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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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0)) ‘식민지’ 미국의 산업과 사회

2014-05-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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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백여 년 동안 간헐적으로 계속 되어오던 영불간의 전쟁이 대강 영국의 승리로 1763년에 끝나자 영국은 West Indies 에 있는 섬 두어 개를 불란서에게 내어주고 그 대신에 캐나다를 독식하게 된다. 영불간의 계속되어온 전쟁은 영국이 전쟁에 혼신을 했던 까닭에 ‘식민지’ 미국의 통치와 착취에 전력을 쏟지 않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미국은 자생적으로 성장하고 쭉쭉 발전해 나갔다. 1700년에 25만 명에 불과했던 인구는 1750년에는 250만 명으로 늘어났다. 흑인노예도 40만 명에 달했는데 뉴잉글랜드 지역에 5만 명, 메릴랜드와 버지나아의 담배농장들에 20만 명, 나머지는 기타의 주들에서 일했었다. 이 무렵에 온 indentured laborer (계약노동자) 라는 백인들도 노예와 비슷하게 혹사당하였으나 그들은 7년여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목돈을 쥐고 자영농장주로서 새인생을 시작했었다고 한다. 미국원주민들도 노예로 혹사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들은 대개 도주해 버렸고 올데갈데없는 흑인들만 계속 노예로 남게 되었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부랑자, 어린애들을 납치 해다가 미국에 노예로 판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 초기 정착자들의 삶은 엄청나게 힘들었을 것이다. 이들의 식구들은 어린이, 할머니 할 것 없이 총동원해서 맡은 일들을 했었다. 그중 가장 힘든 역할을 주부가 맡았었는데 농산물 씨앗보존, 파종, 풀메기 수확 등을 다하였다고 하며 가족들의 식사 외에도 옷의 재봉부터 세탁까지 다하였고 가축들을 사육하고 버터와 치즈 등도 직접 만들어 먹었으며 남는 시간에는 학교가 없던 때인지라 남자아이들의 교육도 했어야 했다. 여자아이들은 가사들만 가르치고 글공부는 시키지 않았었다.

영국식 전통에 따라 여성의 재산소유권은 전혀 인정되지 않았고 여성들은 투표권도 참정권도 없었다고 한다. 유아사망률이 높았던 탓에 보통 열 명의 자녀들을 낳았으며 22명까지 난 예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도 여성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대단히 높았다고 하니 모두들 ‘수퍼우먼’이었던 듯하다. 과부의 재혼이 흔하지 않았던지 남편이 사망하면 농사든, 가게일이든, 대장장이 일이던 간에 남편이 하던 일들을 맡아서 가족을 이끌어갔다고 한다.

의료기술과 시설의 미숙으로 의사를 찾아가면 대개 죽어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었다는 데 아마 만성질환이나 큰상처가 나야 의사를 찾았던 탓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 무렵에는 blood letting 이라고 해서 환자의 피를 뽑는 치료법이 있었다는데 1779년에 조지 워싱턴 대통령도 거머리로 2 quarts의 피를 뽑아낸 후에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한다.

메릴랜드, 버지니아 남북 Carolina, 조지아 등의 주들에 있었던 대농장주들은 미국의 신흥 귀족으로써 식민지에 와서 살고 있는 ‘영국국민’이란 자부심을 가지고 만족스럽게 살고 있었다. 모국에서는 상상도 못해보았던 부자귀족생활을 하고 있던 이 대농장주들은 영국에 충성심을 가진 사람들로써 미국의 독립 같은 것은 상상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남북 Carolina주들과 조지아 주의 농산물들인 쌀과 indigo(염료원료) 등을 영국에 수출하던 항구였던 South Carolina 의 Charleston 은 남부 최고의 경제도시 문화도시로 성장하였다.

담배가 주 농산물이었던 버지니아 주는 마치 지도 위에 손가락들을 펴서 얹어 놓은 것처럼 대서양을 항해하는 큰 무역선들이 왕래할 수 있는 깊은 강과 육지들이 겹쳐있어서 대부분의 대농장주들은 무역선이 바로 정착할 수 있는 개인선박장이 있었다. 이들은 보스턴에 보낼 물건이 있으면 런던으로 먼저 보냈다가 보스턴으로 다시 보내는 식으로 무역선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 농장주들의 판매책인 London agent는 이들의 purchasing agent 로도 일해 주었던 탓에 이들은 런던의 최신 유행을 다 알고 있었으며 가구 등 모든 고급 물건들을 수입해서 썼고 자식들은 런던으로 유학을 보냈었다고 한다.

Boston, Salem, Plymouth 등의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번창하던 뉴잉글랜드 지역은 기온이 엄청 낮은데다가 토지가 비옥하지도 않아서 자급자족정도의 농사만 지었었다. 강이나 계곡들이 낮고 좁은데다 물살까지 세어서 내륙으로 배가 들어가지는 못하였으나 이 거센 물을 수력자원으로 이용하여 후일 공해 없는 방직공장등의 공업발전이 이루어진다.

뉴잉글랜드의 주산업은 어업이었다. 포경업이 성황해서 고래를 잡으러 남미의 브라질과 북극까지 포경선이 원정 했었다고 한다. 작은 조개류, 랍스터로 시작해서 큰 고기들까지 잡히지 않는 고기가 없어서 유럽, West Indies, 아프리카까지 어류를 수출했다고 한다. 대구가 특히 많이 잡혀서 그것들을 소금으로 절리고 말려서 전 세계에 수출하였다.


보스턴 지역에서 생산되는 rum을 서부 아프리카에 수출하고 그 대금으로 노예를 수입해서 West Indies에 팔았으며 그 대금으로 설탕을 사다가 rum을 만드는 삼각무역도 했었다고 한다. 영국이 여러 번의 Navigation Acts를 만들어 수출을 통제하고자 하였으나 이때까지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영국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면서 미국독립의 불티가 이 지역에서 처음 튀게 된다.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뉴욕 등이 포함되는 Middle Colony 는 농산물들을 뉴욕항구를 통해서 전 세계로 수출하였는데 무역업이 크게 성황 하여서 당시 미국 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지역이 되었다. 펜실베이니아에서는 독일인 들이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신식 장총 (rifle)을 생산하였다.

한 가지 특기해야만 할 일이 있다. 미국인들의 교육열이다. Massachusetts Bay 에서는 한동네에 50가족이 정착하면 소학교를 설립하도록 했고 100가족이 넘으면 고등학교격인 Grammar School 을 설립하도록 하였다. 남쪽의 대농장주들은 아예 아이비리그 대학들을 졸업한 개인교수들을 농장에 살게 하면서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보스턴 지역에 정착한지 6년만인 1636년에 목사, 변호사, 고급공무원등을 양성하기 위해서 하버드 대학을 설립했는데 초기에는 의학은 영국에 가서 공부 했던 것 같다. 예일 대학은 1701년 설립되었고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은 1693년에 설립되었다. 1746년부터 1769년 사이에 지금 아이비리그라고 불리는 대학교들이 설립되었다.

미국에서는 초기부터 신문들이 발행되기 시작했으나 1754년까지도 신문이 하나도 없었던 colony들도 세 군데나 있었다. 1733년에 ‘The New York Weekly Journal’의 발행자인 John Peter Zenger가 당시 뉴욕주지사 Cosby를 비난하는 기사를 내고 난후 뉴욕주 검찰총장에 의해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어 8개월간 옥살이를 하면서 재판을 받았는데 대배심원들은 양측의 주장을 들은 후 10분 만에 무죄 평결을 내렸다. 이것은 미국 최초의 ‘언론자유’를 옹호하는 재판으로 “진실한 보도는 명예훼손죄에 해당되지 않는다 (A statement, even defamatory, is not libelous if it can be proved)”는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첫 역사적 케이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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