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4-05-15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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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에겐
날개를
조금 먹고 조금 사는 금붕어에겐
알약을

종일 유리 공을 불고 종일 금간 유리공을 쓰고 돌아다니는 지구인들의 거리를 지나 왔죠 난 자랄 만큼 자랐고 놀란 노루처럼 귀를 세울 줄도 아는데

비가 오는 날은 도무지 약이 없어요


기분은, 비단벌레들이 털실을 다 풀면 돌아올 테고

영원히 살지는 못하겠지만 스카프를 두르고 오래 된 그림책 위를 날아가네요, 꿀을 넣은 작은 홍차를 마실 거예요, 시간과 공간의 모눈종이를 펼치면 난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가슴으로 자주 비가 스며들어온 답니다 뢴트겐씨를 부르고 심장을 얼린다면 살 수 있을까요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거리를 유리온실로 덮어주고 내 기분은 다음 달에 바다로 갔다가 화산을 구경하고 2층버스를 타고 없어질 거예요 누가 뭐래도

- 박상수(1974-) ‘숙녀의 기분’ 전문


이 시대 숙녀들은 부유한다. 그들은 스카프와 꿀을 넣은 홍차처럼 무의미한 생의 부속 장치들과 더불어 산다. 그것들과의 가벼운 유희가 우울과 불안을 처리하는 유일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숙녀들은 불안하지만 현명하다는 것을. 그들도 우리처럼 많은 것을 잃었다가 다시 찾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아주 가벼웠고 따스했고 또 지독히 우울했던 그들의 생을 가만 가만 회고할 것이다.

-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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