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미국개척의 첫 걸음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이민을 온다는 일이 얼마나 험난하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또한 Roanoke Island에 정착해보려고 왔던 사람들의 ‘행방불명’은 미국에 이민 오는 사람들은 멜팅 팟(melting pot)에 자의든 타의든 간에 혼합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Raleigh는 여러 가지 일화를 많이 남긴 사람인데 영국과 아일랜드에 감자와 담배보급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가 처음 담배를 피울 때 그의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나오자 몸속에 불이 붙은 것으로 착각한 하인이 그의 얼굴에 물을 퍼부었다고 한다. Raleigh는 그를 항상 미워하던 제임스 1세에 의해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한 후 1603년에 역모 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런던타워에 감금되었는데 1616년에 가석방이 될 때까지 형무소 안에서 12년 동안 ‘History of the World, volume 1’을 썼다고 한다. 그는 ‘엘도라도’를 다시 찾아보겠다고 제임스 1세를 설득하여 탐색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는데 탐색도중 스페인기지를 습격하여 제임스 1세를 격노하게 만들어서 다시 런던타워에 재수감되었다가 1618년에 사형되었다.
단두대에 올라선 그는 장문의 연설을 하고 의젓한 태도로 사형을 받았는데 사형집행수가 가지고 있는 도끼의 날을 직접 손으로 만져 본 후 “아, 이만하면 만병통치의 약감이 되겠구만!” 이라고 말한 후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의 목이 없는 시신은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St. Margaret Church에 매장되었다. 그의 단두된 머리는 부인이 자신이 사망하기까지 29년 동안 벨벳 보자기에 싸서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떠난 팔난봉꾼 같은 사람으로 해석되기 쉬운 인물이지만 2002년에 영국 국영방송 BBC가 조사한 여론에 의하면 가장 위대한 역사적 영국인 100인 중의 한사람으로 뽑혔다고 한다.
화란은 1609년에 Dutch East India Company가 영국인 헨리 허드슨을 고용하여 지금의 헨리 허드슨 강을 탐색하게 했고 올바니에 모피거래를 위한 기지를 설립함으로써 미국에 발을 들였는데 1614년부터 1667년까지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 펜실베니아, 커네티컷, 로드 아일랜드 일부 등을 포함한 거대한 뉴펀들랜드를 설립하고 1624년에는 Governor’s Island에 모피무역 본부를 차렸고 수도로 뉴암스테르담 이라고 부르던 맨하탄에 Fort Amsterdam성을 구축했으며 1626년에는 원주민 추장들로부터 맨하탄을 60Gilders어치의 물건을 주고 샀다고 하는데 당시 환율로 미화 24달러였다고 한다.
전쟁 중의 부상으로 외발이었던 군인출신 피터 스타이브센트가 마지막의 화란총독으로 십 수 년간 뉴펀들랜드를 통치하여 왔는데 재임 중 뉴암스테르담을 중요한 무역항구로 발전시켰으나 전제적인 통치수단을 썼던 탓에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뉴잉글랜드 지역과 남부지역들을 식민지로 통치하고 있던 영국은 두 지역 사이에 박혀있는 뉴펀들랜드를 가시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영국왕 찰스2세는 동생인 Duke York에게 뉴펀들랜드를 주어 버렸다. York는 영국군함들을 뉴암스테르담에 보내서 스타이브센트 총독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던 스타이브센트는 주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1664년에 총한 번 쏘아보지 못하고 손을 들었으며 1667년에 뉴펀들랜드는 영국령으로 넘어갔다. 그때부터 뉴암스테르담은 뉴욕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4년에 시작한 뉴욕시의 명문 고등학교인 스타이브센트 고등학교는 피터 스타이브센트의 이름을 따서지은 것이다.
미국 식민지 개척에 계속 실패해오던 영국은 엘리자베스1세를 계승하여 왕이 된 제임스 1세가 ‘Virginia Company of London’에게 지금의 뉴저지 북부에서 시작하여 ‘South Carolina’중간지점에 이르는 지역의 개발권을 준다. 이 회사가 배 세척에 태워 보낸 104명의 남자와 소년들이 1607년 5월 23일에 체사픽 만에 도착한 후 강물을 따라 32 마일을 올라간 후 그 지점에 있던 반도에 정착한다. 그들은 왕의 이름을 따라서 그곳을 제임스타운이라고 부르고 강 이름도 ‘제임스‘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곳이 원주민들의 습격도 피하기에 좋다고 생각했고 스페인인들의 습격도 피하기 좋은 곳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저지대인데다가 습지라서 여름에는 모기가 많아 말라리아 병이 창궐하고 우물물을 마시면 이질이 걸리던 험난한 지역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규제가 없이 단원들 간에 다툼으로 질서가 없었는데 ‘존 스미스’라는 선장이 지도자가 됨으로써 질서가 잡혔다.
단원들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원주민들의 공격도 받았었는데 스미스의 노력으로 원주민들과도 화해가 되어 식량도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그해 겨울 전에 단원들 절반이 죽는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 1608년에 물자후원선에 남자 여자 어린애 등 추가 개척단들이 왔었는데 스미스는 화약폭발로 크게 부상을 당하여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추가로 개척자들이 왔었는데 1609년 겨울에 440명이 죽고 60명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극도의 식량부족으로 사람들이 죽었는데 식인을 했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이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한 가지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은 이 개척자들이 선거로 입법기관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House of Burgess 라는 입법부인데 후일 제임스타운이 영국내의 정치적인 이유로 왕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Royal Colony가 된 후에도 이 입법부제도를 계속 인정해주게 되었다. 1619년 6월 30일에 House of Burgess가 첫 모임을 가졌다. 독재보다 자치제도가 미국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1619년에는 미혼처녀들이 오기 시작하였고 처음으로 20명의 흑인들이 왔는데 그들은 노예가 아니라 계약노동자 (indentured servant)들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영국에서는 계속 보급물자를 보내주었다고 하는데 천만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 개척단원들이 재배하기 시작한 담배가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팔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담배를 영국에 수출함으로써 이들은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엄청난 고난 끝에 식민정착에 드디어 성공하였고 미국식 풀뿌리 (grass root) 민주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