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타산지석

2014-03-28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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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태격 / 사업가

뉴욕의 한인 밀집지역에 니키타 레스토랑이라는 그리스인 식당이 있다. 그곳으로 갈 때마다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인물이 떠오른다. 냉전시대의 한 가운데 서있던 구소련의 제일 서기장이었으며, 지난 한달 넘도록 외신 머리기사를 장식했던 ‘크림반도 위기’의 원인(遠因)을 제공한 니키타 흐루시초프 수상이다. 바로 그가 1954년 2월 소련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양도하였다.

17세기 이래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어있었던 러시아인들이 아니었던가? 19세기 말 구한말에는 한반도로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여 고종 황제의 아관파천을 주도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럼 왜 100년 전인 1853년부터 1856년까지 3년 동안 영, 불, 오토만 터키를 상대로 러시아인 20만명 이상이 목숨 바쳐 싸웠던 전략적 요충지이자 부동항인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로 양도하였을까.


러시아학을 전공하는 서방 학자들은 다음 3가지 주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흐루시초프로서는 1953년 3월 스탈린 사후 정권을 장악한 이후, 본인의 정치력을 실험해 볼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향후 많은 정책을 수행해 나가야 할 최고통치권자로서 어떤 정치국원이 본인이 하고자하는 정책에 반를 드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크림반도가 바로 그 테스트 케이스, 즉 제물이 되었다는 견해다.

둘째, 2차 대전시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싸운 우크라이나에 대한 우정의 징표로, 선물로 주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다. 당시는 독립을 추구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을 때였다. 스탈린이 1949년 그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이기 전까지 흐루시초프는 우크라이나에서 공산당 정치위원로 스탈린의 숙청작업을 집행한 바 있다. 그의 부인은 우크라이나 출생이다. 그는 모스코바 정치국원 누구 보다도 우크라이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셋째, 크림반도 재건비용을 우크라이나로 떠넘기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분석도 유력하다. 스탈린은 1944년 크림반도에서 다수를 이루며 대대로 살아왔던 타타르인들이 전쟁동안 나치 독일군에 협력하였다는 이유로 대량 추방 시켰다. 그로인해 크림반도는 공황에 가까운 경제적 재앙을 겪고 있었다.

지난 60년간 우크라이나인들이 재건하여 놓은 크림반도를 ‘북극의 곰’이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삼켜 버렸다. 크림반도에 주둔하고 있었던 우크라이나 해군병사들이 기지를 말없이 내어주고 보따리를 싸가지고 기지 정문을 빠져나오는 모습이 측은하고 불쌍하기까지 하였다.

무력 앞에 정의란 존재하지 않고, 국제법도 종이조각이었을 뿐이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경제적 제재를 추진하고 있다지만, 그외 다른 묘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속수무책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겠다. 자고로 경제적 제재가 실효를 거두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대한민국은 4강(强)에 둘러싸여 있다. 절대로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올해로 천안함 피폭 4주기를 맞았다. 영해를 방위하다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해군장병 47명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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