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4-02-06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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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랑을 묻은 곳에 새 사랑을 묻으러 왔네
동백은 없고 노래방과 여관들이 나를 맞네
나이트클럽과 식당 사이를 소독차가 누비고
안개처럼 번지는 하얀 가스...... 산의 윤곽이 흐려진다

神이 있던 자리에 커피자판기 들어서고
쩔렁거리는 동전소리가 새 울음과 섞인다

콘크리트 바닥에 으깨진,
버찌의 검은 피를 밟고 나는 걸었네
산사(山寺)의 주름진 기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최영미 (1961- ) ‘다시 선운사에서’


사랑의 아픔을 묻으려 찾아온 선운사, 동백이 있던 자리엔 여관과 노래방들이 즐비하고 부처라도 계실 듯 풋풋하던 자리엔 자판기가 들어서있다. 으깨진 핏빛 버찌는 사랑 또한 추하게 변색했음을 암시한다. 사라진 것은 선운사 풍경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란 것에 시인은 한탄하는 것이다. 가슴 속 붉던 동백꽃은 지고 부랑하는 소음만이 가득하니 그 누가 누구를 알아보겠는가.

-임혜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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