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4-02-04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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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을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후략-


-김이듬(1969- )‘시골창녀’ 일부


진주 남강, 유등축제의 밤을 걸으며 시인은 사대부 집안의 후손이기보다 백정이나 노비, 기생의 후손이고 싶어 한다. 분방하나 정열적 지조가 깃든 진주 남강. 그곳에서 비운의 개인사와 함께 몸부림치던 역사의 슬픈 현장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시 속의 관비 고모와 백정 할아버지는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가. 허접한 신분 상승만을 꿈꾸는 천박한 족보사회에 신선하게 딴죽을 거는 소리가 들린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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