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4-01-28 (화) 12:00:00
크게 작게
방 하나를 갖고 싶어요
주소도 없고
어떤 후일담도 도착하지 않는 곳
벽에는 못자국이 없고
구석에는 우는 아이가 없고
문 앞에는 딱 한 켤레의 신발만 있는 곳
잘 손질된 폐허 같은
빈 방이 있으면 좋겠어요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하루가 가고
젖은 성냥을 그어대는 밤
내 등뼈의 램프에 불을 붙이고 잠든
당신들의 꿈 보다 멀리 가고 싶어요
잠긴 집 안의 정원보다
열린 방 한 칸의 어둠이 따뜻해 보이는 곳
바위를 깎아
그 안에 만든 방이라면 더 좋아요
부서진 봄 여름 가을 겨울
나와 나 자신과 단 둘이 살그런 빈 방 있나요

- 이운진(1995‘시문학’ 등단 ) ‘빈방 있나요’ 전문


삶에 지친 한 개인이 잘 손질된 폐허를 갈망한다. 퇴락한 폐허가 아니라 폐허, 그 자체로 가득히 빛나는 폐허. 그곳은 아무의 간섭도 없이 자신을 조용히 마주할 수 있는 치유의 장소이다. 인연의 보채임 소리도 문명의 사나운 위협도 못자국처럼 아픈 기억도 다 사라진 곳. 상처받은 개인을 온전히 받아주는 그런 장소가 현실에는 없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모든 이의 상상 속에 그 방이 있으리니.

- 임혜신 <시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