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4-01-02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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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리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1912~ 1996)‘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어느 외곽의 술집에서 홀로 소주를 마시며 오지 않을 연인을 생각하는 화자. 푹푹 내려 쌓이는 눈 속에서 그는 연인과 함께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 상상을 한다. 먼 산골, 저 순수한 환상의 백색 천국에는 가난해서 더욱 아름다운 연인이 있고 응앙응앙 좋아서 우는 관능의 당나귀가 있다. 연인과의 도주를 꿈꾸는 이가 어찌 백석뿐이랴만 암담한 현실에 비추이는 사랑의 환상을 이토록 감미롭게 그려낼 수 있는 이는 그뿐인가 싶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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