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3-12-31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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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 차방에 앉아서
소리 없이 남한강 북한강의 결합을 바라보는 일,
차통(茶桶)에서 마른찻잎 덜어 낼 때
귓밥처럼 쌓여있던 잡음도 지워가는 일,
너무 뜨겁지도 않게 너무 차갑지도 않게
숙우(熟盂)에 마음 식혀내는 일,
빗소리와 그 사이 떠돌던 풍경소리도
타관(茶罐) 안에서 은은하게 우려내는 일,
차를 따르며 졸졸 물소리
마음의 먼지도 씻어내는 일,
깨끗하게 씻길 때까지 몇 번이고
찻물 어두운 내장 속에 흘려보내는 일,
퇴수기(退水器)에 찻잔을 행구 듯
입술의 헛된 말도 남은 찻물에 소독하고
다시 한 번 먼 강 바라보는 일,
나는 오늘 수종사에 앉아
침묵을 배운다

-길상호 ( 1973-)‘묵언(默言)의방’ 전문


12월은 분주하다. 달력에 31일이라 적혀 있건만 한 5일이나 될 뿐인 듯 12월은 왔는가 하면 가버린다. 어느새 2013년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묵언의 방에서 차를 마시듯 조용히 보내는 것은 어떨까. 입술의 헛된 말도 씻고 마음의 먼지도 털어내고 귓속의 잡음도 닦아내며 소란했던 한 해를 차분하게 보내고 다가올 새 아침을 보다 정갈한 마음으로 맞이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다.

-임혜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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