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2013-11-19 (화) 12:00:00
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했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婚期)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밭을 헤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은 흐르고, 엽서 속 글자 수는 줄어들고, 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 심보선 ( 1970- )‘나날들’ 전문
아픔과 결핍조차 청춘의 계절에는 아름답다. 봄의 문란함, 여름의 뜨거움, 가을의 자유로운 폐허, 그리고 겨울의 방황, 그 모든 것이 청춘에게서는 빛난다. 청춘을 흘려보낸 이는 노변에 앉아 한탄한다. 상실에 대해 또한 한 시절의 진정함을 지켜내지 못한 불성실에 대해. 그러나 탄식하지 말자. 타오르는 것들의 속성은 대개 불충실한 순정함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다만 그리움에 충실하여야 할 때에 이른 것일 뿐이리니.
- 임혜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