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요로의 초대

2013-10-15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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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는 그냥 밟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하셔야 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 만 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스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 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 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를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

조정권(1949- ) ‘고요로의 초대’ 전문

누가 우리를 고요의 집으로 초대하고 있다. 이 집은 상상의 집일수도 있고 우리들 각자의 내면의 집일수도 있고 자연 그 자체 일수도 있다. 적막이 가득하지만 심심하지 않다. 장작과 달빛과 먼지가 소찬을 벌이고 열린 창문으로는 모기손님 낙엽손님도 편안히 드나든다. 더 신기한 것은 초대하는 이와 초대받는 이가 하나라는 것이다. 낡은 것들이 어울려 평화로운 집. 잘 익은 적막이, 쉬세요 쉬세요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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