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제08-c13

2013-10-03 (목) 12:00:00
크게 작게
사각의 틀에 가두어 키를 키우던 토끼가
사각의 틀을 깨고 나와 남새밭을 휘젓고 있다고
둥근 콩잎의 초록빛을 모조리 뜯어 먹는다고
콩밭 주인 할머니가 전화통 속에서 길길이 뛴다

하던 일 내려놓고
원시의 내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토끼 몰러 나간다

천지에 문이 열리는 새봄 상큼한 식욕에 이끌려
토끼라는 이름의 도발꾼은 이방의 문명 속에 끼어들어 갔다
저기, 쫑긋두 귀로 지상의 긴장과 불안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전설 속 제 아비의 도발적 삶처럼
뛰어야만 하고 뛸 수밖에 없는 관습의 힘으로
직선이 아닌 사선으로 교묘히 콩밭의 행간을 누비며
나에게 진화의 속력을 가르친다
…중략…
10만 년 전,숲 속에서 들개무리에게 쫒길 때처럼 오늘 나에게 쫒기기 않는다면
토끼의 두 발은 마른 나무토막처럼 멈출 것이다
무료한 사각의 틀로 돌아가 퇴화의 잠을 잘 것이다


뛰어라 토끼야
네가 뛰어야 나도 뛴다

<이기와 (1968-)> ‘뛴다’


키우던 토끼가 달아나 동네 텃밭을 마구 헤집고 다니고 있다. 토끼를 잡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화자. 본의 아니게 무료한 사각의 틀 밖으로 내달음 치게 된 셈이다. 달콤한 식욕에 이끌려 긴장과 불안의 위험세상으로 달려 나간 토끼와 주인. 콩밭의 행간을 누비며 쫓고 쫓기는 진화의 뜨거운 현장으로 돌입한다. 심장이 팡팡 뛰고 숨었던 야성이 살아난다. Use it or lose it,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 그러니 달려라 토끼야, 관습의 울타리 밖으로.


임혜신 <시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