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악어핸드백

2013-09-24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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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출근길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핸드백을 열고 화장을 한다
새끼 누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장정에 오른 누 떼의 헐거운 발굽이
탯줄 같은 상형문을 마른하늘에 눌러쓴다
배꼽 속으로 말라붙는 탯줄만큼 가뭄도 기어올라
젖통 가득 허방을 채운다.
마른 씨앗을 털어내며 삼천리를 걸어온
채식주의자의 소원은 물 한 모금 마시는 것
물비린내를 풍구질하는 악어의 눈빛이
수십만 마리의 소원을 빙산처럼 얼려놓았다
불씨처럼 튄 새끼 울음소리 한 촉
어미의 중추신경에 옮겨 붙는다
물의 자성에 불꽃 한 송이 끌려간다
어미를 물어뜯어 삼킨 악어들이 요동친다.

차주일 (1961-)‘악어핸드백’ 전문

우리가 좋아하는 가죽제품들은 모두 생명을 죽이고 얻은 것이다. 지하철 안에서 악어 핸드백을 열고 화장을 하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화자는 악어들의 고통을 상상한다.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악어의 살육보다 사치를 위한 인간의 살육이 더 잔혹하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작은 벌레에서 짐승, 악어에 이르기까지 산 것 중에 함부로 다루어져도 되는 것은 없다. 새로운 재료의 가방도 예쁘고 실용적인 것이 많으니 가죽을 얻기 위한 살생은 이제 끝났으면 좋겠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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