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지같은 날

2013-09-12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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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영혼의 땅
티베트에도 거지가 있다
사원이나 찻집마다 따라 붙는다
티벳사람들, 주머니가 궁해도
이승의 공덕을 쌓게 해주어 고맙다고
거지를 후하게 대한다
시인살이 하루 작파하고 누워
거지같은 생각을 한다
지상에서 가장 높은 거지마을에도
가난한 별빛이 내리겠지
거지노릇 마친 그들과 둘러앉아
지폐를 세고 있겠지
우습다
벼랑 끝 시를 밀고 있는
이, 거지같은 사랑

이영식 (2000년‘문학사상’으로 등단)
‘거지같은 날’ 전문.

척박한 눈의 나라 티벳.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걸인을 박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세를 위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거지를 후대하는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다. 그런 곳에 내리는 별빛은 세상 어느 곳보다 빛난다. 화자는 상상 속에서 티벳의 거지가 되어 그들과 함께 가난한 밤을 맞는다. 한 푼 보태주지는 못하지만 마음이 닿아있으니 이것도 사랑은 사랑일 터이다. 실속 없는 이 사랑도 이승의 공덕을 쌓는 일에 조금은 보탬이 될지 않을까 싶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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