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2013-08-06 (화) 12:00:00
형은 평생 독선생을 자청한
할아버지의 두툼한 손을 가졌다
고등학교를 들어갈 나이가 되어서도
공책 몇 장씩 가족 이름만을 필사하던
장애 이급의 손을 가졌다
그는 가난한 친구에게 할아버지 몰래
슬쩍 공책 몇 권 집어주던
날랜 손을 가지고 있다
대나무밭을 들락거리며
담배를 일찍 배우던
니코틴 노랗게 밴 손가락을 가졌다
구름 그늘 몇 근 내려앉을 때까지
어린 내가 꺽꺽 울면
말없이 내 등을 토닥여주던
골 붉은 손을 가지고 있다
그는 평생 숙제처럼 적었던
종(鍾) 현(賢) 정(貞) 용(容) 이름자들
죄다 잊은 치매 깊은 손을 가지고 있다
내게는 그런 손을 가진 형이 있다.
박소원 (1963-) ‘손’ 전문
모두들 자신만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쓸쓸한 시대에 만나는 장애 이급의 손을 가진 형은 따스하고 또 용감하다. 너무나 많은 지식과 재주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사실 우리는 얼마나 고단한가. 치매 깊은 손, 그것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치유의 손길이다. 슬플 때 말없이 토닥여 주는 튼튼하고 선량한 장애자. 그가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배우려 종 현 정 용, 평생 공책에 베끼듯 우리는 그에게서 인간의 따스함을 배우려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임혜신<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