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사랑니가 나기 시작한 지 일이 년쯤 됐다. 처음 세 개는 20대 중반에 일이 년에 걸쳐 났고, 치과에 갔다가 발견해 의사의 지시에 따라 그 자리에서 다 빼 버렸다. 그래서 지금 나고 있는 이 사랑니가 마지막 네 번째의 사랑니다. 최근 들어 통증이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빨 전체의 표면이 올라와 있었다.
사랑니 세 개를 다 빼버린 직후에는 괜히 뺐나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냥 두면 나중에 어금니가 상하거나 했을 때 유용하지 않았을까. 의사들은 사랑니는 대체로 잘 썩고 앞의 치아를 밀어서 무리를 줄 수 있다며 빼는 게 좋다고만 했지 그대로 놔두라는 의사는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치과에 간다면 그 자리에서 이 마지막 사랑니마저 빼버리게 될 것이 뻔하다.
사랑니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나는 시기가 사람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 때며, 특히 새로 사랑니가 날 때 마치 첫사랑을 앓듯이 몹시 아파서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영어로 wisdom tooth라고 불리는 이유도 그 시기가 사람들이 좀 더 현명해지는 나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랑니는 인간의 저작활동이 옛날에 비해 덜 필요해짐에 따라 점점 퇴화해 이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라져 가는 신체의 일부이다. 60%의 사람만이 4개가 모두 나고, 7%의 사람들은 아예 사랑니가 나지 않는다고 하니 사랑니가 다 나오는 경우는 진화가 덜 되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사랑니나 wisdom tooth나 이름만 들으면 가장 소중한 무언가일 것 같은데,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다니, 참 아이러니한 작명이다. 사랑니가 나면 대개 아프고 빼기도 힘드니 소중하기는커녕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신체 일부의 효용가치를 따진다는 것. 아무리 내 몸의 일부라 해도 조금 주제넘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쓸모가 없으면 필요가 없고, 필요가 없으면 존재가치가 없어지고, 존재가치가 없어지면 사라져야 하는 것. 그게 과연 사랑니에만 적용되는 세상 논리일까.
왜 인간이 사느냐, 또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가슴 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산책을 하다가 또는 책을 읽다가, 또는 빗속을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튀어 올라오곤 한다. 그 질문은 고전 책들의 주제가 되기도 했고, 철학자, 사상가, 종교 지도자들이 그 답을 찾으려 애써 왔고, 우리는 그 흔적을 쫓으려 애쓴다.
과연 나란 인간의 존재가치, 효용가치는 무엇일까.
사랑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어떤 이유가 있을까. 나는 왜 살아가며, 왜 존재하는가. 아파오는 사랑니를 만져보며 다시 그 질문을 떠올린다.
얼마 전에 읽은 법륜스님의 글에서 그 대답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사람이 하루하루 사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산다는 것. 풀이 자라는 데 이유가 없듯,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법륜스님의 말씀은 ‘그냥’ 사는 것이니 대충 살아가란 말씀은 아니다. 왜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득 ‘왜 사느냐’라는 질문은 인간의 자만이 배어있는 질문이란 생각이 든다. 나의 존재 자체가 대단한 의미를 지녀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이므로.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헤매고 방황하는 존재라는 매우 기만에 찬 자기 존재 인식이다.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다. 왜 사느냐라는 질문을 걷어내고 나니, 우월한 존재인식을 걷어내고 나니, 내 존재가 길거리에 핀 꽃 한송이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니, 오늘 사는 하루가 대단한 의미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만큼이나 표정도 가벼워진다.
사랑니가 오늘도 아프다. 치과에 가서 빨리 빼버리는 대신 그냥 조금 놔두어 보는 게 어떨까 싶다. 이 고통이 내게 왜 사느냐와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질문을 하게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존재 의미가 아니겠는가.
김진아 /쿠알라룸푸르 Young & Rubicam 광고전략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