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드라마 작가인 친구에게

2012-04-20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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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금숙 <소설가>

나 죽을 것 같아. 내일 아침 눈도 못 뜰 거야. 지금 세 시간째 이렇게 앉아 있다. 대화에서 한 마디도 생각이 안나 그 다음 대화로 못 넘어가고 있어. 어떡하니?
그냥 넘어가! 시청자들은 별로 못 느끼니까. 그렇다고 밤을 홀랑 새울 거야?
나, 아무래도 이번 드라마 끝내고 작가 그만 둘까봐. 이제는 참신한 아이디어도 없고 젊은 작가들 머리 핑핑 돌아가는데 도저히 못 따라가겠어.

그러지 말고 힘내. 너는 그래도 가치관이 뚜렷하고 따듯한 드라마를 쓰잖아. 젊은 작가들 막장으로 막 나가버리는 드라마 눈살 찌푸려져. 작가 그만둔다고 한 게 하루 이틀이니? 매번 그랬잖아. 시청률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네 스타일대로 써. 건전하고 따뜻하게 감동을 주는 네 드라마가 나는 너무 좋아.
고마워! 너만 내 편이야. 시청자가 다 너만 같았으면 얼마나 좋겠냐? 욕심이겠지. 월요일 아침 7시 되면 시청률이 인터넷에 뜨거든,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끔찍해.

한국시간 새벽 3시에 드라마 작가인 친구 P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P는 본국에서 43년째 성공한 드라마 작가로 대가의 명목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를 쓸 때마다 죽는다 산다 숨이 턱에 걸려 있다. 그러면서도 결국엔 40회 주말극을 성공적으로 끝내게 될 것이다.


왜, 미리 다 써놓고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물론 대본도 한 10회분까지를 미리 써놓고 드라마를 시작하지만 금방 대본이 딸리게 된단다. 그래서 드라마 쓰는 6개월 동안 바깥세상과는 담을 쌓고 방에 틀어박혀서 대본에 몰두한다. 한 시간이 아까워서 하나밖에 없는 손주 돌잔치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까지 쪽대본은 한 번도 날리지 않았다고 했다. 일주일에 단편소설 3편 정도의 분량을 써내야 된다니 일단은 분량에 치어서 죽을 것 같다는 것이다.

나는 소설 한 편을 쓰는데 몇 달을 뭉개다가 그나마도 끝을 못 내고 미루어 두게 되는데 감히 친구 앞에서 글 쓴다는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다른 글보다 시간을 정해놓고 쓰는 드라마는 정말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 쪽대본까지 날려야 되는 작가들의 절박함을 알겠지만 배우들이 시간에 쪼들려 충분히 대본을 소화시킬 수 없다면 무슨 연기를 기대하겠는가.

친구야! 요즘 드라마 추세가 막장 드라마로 많이 흘러가고 있어서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것 한심한 일이다. 근친혼으로 얽히고설키지를 않나, 위아래도 없이 삿대질을 하고 대들지를 않나, 미혼녀들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남자 등에 업혀가질 않나. 어떤 드라마는 안방에서 온 가족이 보기엔 정말 민망한 장면들이 너무나 많다. 어떤 드라마는 전혀 현실감이 없고 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어 외면하게도 된다.

시청자들의 추세인지 아니면 작가들이 시청률에 민감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지만 매회 자극적인 변화를 원하는 시청자들의 요구에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지 않을까. 젊고 톡톡 튀는 인기 드라마 작가인 조카도 나를 들볶기(?)는 마찬가지다. 가을에 나갈 드라마의 시놉을 쓰고 있는데 잘 안 돼 머리에서 쥐가 난다며 이모가 작가되라고 했으니 책임지라고 푸념을 해댔다. 막장 드라마가 아닌 세상을 따뜻하고 밝게 바꿀 드라마만 쓴다면 그 정도의 푸념인들 대수인가.

사랑하는 친구야, 조카야! 냉정한 시청자로서 부탁한다. 드라마작가들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엄청나기 때문에 작가들의 냉철한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 착한 드라마가 성공하기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너희들이 먼저 깰 수 있는 작가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정말 좋은 드라마, 아름다운 드라마, 세상을 밝게 해주는 드라마에 시청률이 팍팍 올라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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