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골프와 헤어지다

2012-04-1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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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하는 삶

골프와 헤어지다

김 범 수 <치과의사>

누군가 나에게 점잖게 “골프 구력이 얼마나 되십니까?” 묻는다면 나도 점잖게 대답할 것이다. “20~30년 되지요.” 그런데 “핸디는 얼마입니까?”하고 묻는다면 나는 우물쭈물하며 말할 것이다. “그게… 그러니까… 하도 오래 안 쳐서… 열 두서너… 대여섯… 예닐곱…”
자전거나 수영처럼 골프도 한 번 배우면 언제라도 다시 즐겁게 필드에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미워하리라. 골프는 마치 콧대 높은 젊은 애인 같아서 내가 조금만 다른 데 신경을 팔면 금세 토라져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그린을 벗어난다. 그렇다고 너무 졸졸 따라붙으면 내 편인 척 달콤하게 굴다가 갑자기 배신을 하고 흥! 나를 놀리며 도망을 갈 뿐.

한때 나도 골프에 미쳤었다. 자고 깨면 골프 생각만 났다. 정기적으로 만나 함께 치는 팀이 두세 그룹 되니 그 일만 가지고도 한 주일이 바빴다. 멋진 코스에 어렵사리 티타임을 잡은 날은 전날 밤부터 설레어 잠을 설치곤 하였다. 새벽 한두 시에 깨어도 다시 잠자리에 들기가 아까워, 달밤에 체조라고 놀리든 말든 컴컴한 마당에 나가 드라이버로 스윙 연습을 해보기도 하고 새로 산 퍼터를 반짝반짝 닦느라 새벽이 밝아오기도 하였다.

주말 플레이를 앞두고 금요일 저녁 골프 연습장에 가면 타석은 언제나 만원이다. 모두들 앞 사람 엉덩이를 바라보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클럽을 휘둘러댄다. 나는 왼손잡이이므로 맨 구석자리에 앞사람 얼굴을 마주보고 선다. 공부를 이리 열심히 했으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시키는 사람도 없는데 다들 죽어라 연습을 한다. 마누라가 심부름으로 시켰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그 좋던 골프를 나는 더 이상 치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주문했던 각종 왼손잡이용 클럽들이 포장도 풀지 않은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창고에 누워 있다.
하루가 24시간 밖에 안 되므로, 일주일이 고작 7일밖에 안 되므로 나는 골프를 칠 짬이 없다. 2012년 달력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11월부터 열어보았다. 11월은 거의 매년 아프리카로 단기선교 여행을 가는 달이다.


지구 반대편의 날씨는 여름이니 쓸 데 없는 개인용 짐 대신 나눠줄 물건들을 더 많이 싸갈 수 있어서 좋다. 학생들은 방학일 테고, 그러므로 물탱크에 더 많은 물을 길어다 부을 수 있고, 주민들을 모아서 치료하기에도 적당하다.
그 다음으로 짝수 달의 캘린더를 뒤적인다. 멕시코 단기 선교가 여러 차례 계획되어 있다. 다음으로 비어 있는 홀수 달을 찾아본다. 파나마와 남미, 중국과 인도…. 가야 할 곳은 많은데 세월이 모자란다. 이미 살아버린, 과거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앞으로 살아야 할, 남아 있는 시간을 아끼며 살았으면 좋겠다. 1년 달력을 왕년의 골프 대신 채운 단기선교 일정들 사이사이에는 무릎 꿇는 기도가 이어지기를 소원한다.

악기를 하는 친구들은 ‘하루 연습을 쉬면 자신이 알고, 이틀을 쉬면 단원들이 알고, 삼일을 쉬면 청중이 안다’ 고 말한다. 나는 기도에 대하여 똑같이 생각한다. 하루 기도를 쉬면 삶이 얼마나 삐거덕거리는지 자신이 알고, 이틀을 쉬면 ‘뻔한 인간’ 으로 추락한 나를 가족들이 알고, 삼일을 쉬면 이 세상 마귀들이 다 알고 공격을 해온다.
그래서 나는 골프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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