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2-04-05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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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지 않은가
뒷산에서 길을 잃다니
눈 아래로 낯익은 얼굴들이 빤히 보이는데
한 달에 몇 번씩 오르는 뒷산에서
물통을 두고 온 약수터를 찾지 못해
두 시간씩 세 시간씩 오르내리는 꼴이라니
더 우스운 사실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 누구도
길을 모르더라는 사실이지
― 그냥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이더라구
약수터에 두고 온 때 낀 물통만 아니었다면
그들처럼 그냥 길을 따라 걸으련만
차마 손 타고 물때 낀 물통을 포기할 순 없더군
자네도 길을 잃어보게
뒷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약수터에 두고 온 물통을 포기할 수 있는지
우습지 않은가
뒷산에서 길을 잃다니

- 곽효환(1967 - ) ‘뒷산에서 길을 잃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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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가던 길인데도 내려야 할 출구를 놓쳐버리고 한참을 더 운전한 적이 있다. 황당하지만 그리 나쁜 경험만은 아니다. 너무 낯익어 무심결에 지나쳤던 건물, 길, 공원, 멀리 보이는 산 등을 새롭게 만나게 된다. 부부싸움도 그런 경우다.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상대방의 생각과 입장을 헤아려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화자는 약수터에 둔 물통을 포기할 수 없어서 옛길을 찾는다. 그동안 물때처럼 낀 그놈의 정 때문이다.

<김동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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