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예수 부활’의 증인들

2012-04-0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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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인의 신앙

어릴 적 시골에서 자라면서 동네 아이들과 툭하면 내기를 걸었다. 이웃집 개똥이네 어미개가 여섯 마리의 강아지를 낳던 날도 그랬다.
짐승뿐 아니라 사람마저도 한 번에 하나씩 낳는 걸로 믿어왔는데 쌍둥이도 아니고 여섯을 낳았다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목에 힘주고 떠들어대도 아무도 안 믿어주니 개똥이는 너무 답답했던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겨울 추위도 아랑곳 않고 웃옷을 전부 벗고 주먹으로 가슴을 쳐댔다. 놀란 나머지 몇몇 아이가 믿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과반수는 미심쩍어 하는 눈치였다. 마침내 미칠 지경이 된 개똥이는 바지까지 전부 벗겠다고 나섰다. 결국 덜덜 떨면서 아랫도리까지 벗고 뒤돌아 엉엉 울어버리는 개똥이를 보고서야 우리 모두는 그 집 어미개가 한꺼번에 정말 여섯 마리의 강아지를 낳았다고 믿었다.

애당초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개똥이도 친구들을 데리고 가 강아지를 보며주고 싶었을 터인데도 혹시 부정 타면 어미개가 강아지들을 죽여 버릴지 모르니 가까이 가지 말라는 어른들의 엄명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꿎은 제 가슴만 두드린 것이다.
본래 ‘믿음’이란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든지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면 최소한 이성을 뛰어넘는 초인적인 ‘증거’를 보여야 한다. 자기 자신을 걸만큼,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목숨’마저 내놓을 정도가 되어야만 남을 보지 않고도 믿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 부활’에도 생명을 건 ‘증거자’들이 필요했던 것일까. 제자들은 물론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기에 말이다. 참 희한한 일이다.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말씀 한 마디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나자로까지 살려내신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제자들이다. 그런 그들마저 믿기 힘들어 했던 것이 ‘예수 부활’이어서일까. 심지어 토마스 제자조차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손으로 확인하길 원했다. 그러니 일반 사람들이야 누가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비록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나자로와 회당장의 딸을 살려내시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지니신 ‘당사자’인 예수의 죽음이기에 그랬다. 능력의 그분이 돌아가셨는데 그 누가 다시 살려낸단 말인가.


여섯 마리 강아지 출산조차 말만으로 믿지 못하는 게 인간의 마음이다. 그렇기에 예수 부활에는 더 큰 ‘보증’이 필요했다. 사도들이 제 아무리 직접 만났다고 말해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큰 사건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도둑 누명을 벗기 위해 양잿물을 마시고 죽음으로써 결백을 호소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이 때문에 예수 부활에는 증인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보증해 줄 증인들의 ‘목숨’이 요구된다. 수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발토로메오, 바오로 등의 죽음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무려 2만여명이 생명을 던져 증거했기에 토마스조차 믿기를 망설였던 예수 부활을 99.9%가 아닌 ‘100%’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을 쳐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은 실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의 전부다. 예수 부활은 장차 경험할 우리 자신의 부활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이번 부활절을 준비하는 우리의 존재와 삶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증거’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부활의 주님께서 몸 둘 바 모르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해 주신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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