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연

2012-03-22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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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살에 LA에 와서 산타모니카 칼리지에 다녔다.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클래스가 끝나고 선생님을 기다렸다가 “같이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예쁘고 멋진 선생님에게 선뜻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지금까지도 선생님과 절친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데 선생님은 내가 그렇게 물었던 순간이 자신의 삶 중 가장 행복한 순간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구하기 위해 롱비치의 벨몬쇼어 쪽에 집을 찾고 있다고 하며 어떤 집에서 살고 싶으냐고 묻기에 연보라빛 타일이 있는 목욕탕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바닷가에서 5분, 스페니시 아치 스타일, 이층집, 고양이가 드나들 수 있게 설계된 문이 있는 집이 그녀가 원하는 집이었는데, 놀랍게도 우린 원하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연보라빛 타일이 있는 집에서 살았다.

당시엔 백화점 광고에 사진이 아닌 일러스트레이션을 썼는데, LA의 가장 유능한 패션 일러스트레이터였던 그녀의 또 다른 꿈은 화가였다. 내가 그림을 그려 놓으면 무척 좋아하곤 했다. 매일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함께 바닷가에서 뛰곤 했고 주말이면 싱싱한 복숭아 파이를 먹으러 가곤 했다. 운동을 좋아해서 늘씬하고 건강했던 그녀는 윈드서핑, 행글라이딩 등 격한 운동을 즐기곤 했다.


그분과 1년을 함께 산 것이 나의 미국 생활의 즐거운 시작이었다.
몇 년 후 집에서 사는 것 보다는 배에서 살고 싶다고 집을 팔고 배를 샀는데, 그녀의 배가 정착해 있는 롱비치의 포구를 찾아가 며칠 함께 지낸 기억이 있다. 다른 배를 가진 남성을 만나 결혼했는데 지금은 플로리다 주에 살고 있고 늘 연락해오곤 한다.

내가 타고난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인복인 듯싶다. 늘 좋은 인연을 만나 벅찬 행운을 누려 왔다. 나의 삶을 가장 크게 변화시킨 인연은 명상하는 데 같이 가자고 한 친구와의 인연이다.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장 크게 변화시켰고 가히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큰 변화였다.

영미문학을 좋아하며 자란 나로 하여금 마음의 고통의 근원을 묻는 명상을 통하여 모든 것이 나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배우게 했다. 내 마음이 열리면 모든 것이 지복의 상태라는 것을 알게 해준 친구와의 인연을 정말 감사히 여긴다.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서 묵으며 여행하는 게 멋진 삶이라고 생각하던 나를 캠핑에 데리고 가기 시작하여, 태양에 달구어진 깨끗한 대지에서 자고 나면 온 몸이 가뿐해진다는 것을 알려주고 별밤과 자연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해준 화가 부부와의 인연 또한 감사하다.

요즘엔 요가를 시작했는데 좋은 벗들과 함께 요가를 하는 시간에 몸과 마음의 참된 지복을 느낀다. 늦게라도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이끌어준 친구와의 인연에 또 감사한다. 진땀을 흘리며 집중하는 요가가 끝난 후 눈이 밝아지고 세상이 눈부시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온몸의 상쾌함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복의 상태를 누리는데 늦게라도 시작한 게 무척 다행으로 느껴진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달리던 젊은 날의 추억처럼 마음만은 ‘영원한 청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자유롭고 온전한 상태를 겪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친구와의 인연… 내가 죽을 때엔, 진정으로 고맙고 멋진 인연으로 가득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박혜숙/ 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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