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2-03-15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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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날 찾아 온 걸 보니
난 아직 네게 빚이 남았나 보다

옛날의 어떤 여자는
살빚도 탕감해 주고

옛날의 어떤 여자는
술값도 깎아 주더만


또 다시 날 찾아 온 너는
감춰진 나의 횡격막을 들치는구나

나 이만큼 살면서

이토록 나이 먹어 본 것도
태어나서 처음인데

넌 이만큼 살면서 늙지도 않고
백방사 속곳가래 있는 대로 보여주며
나의 짱배기에 어깨죽지에
살못을 박아대는


참으로
못된 여자

봄빛...

채영식(1955 - ) ‘못된 여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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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참 못 됐다. 나이가 들어가니 잊어버릴만도 한데 매년 찾아와서 남은 빚 독촉을 하고 있다. 봄빛이다. ‘빛’을 같은 소리를 가진 ‘빚’으로 연결시킨 말 다루는 솜씨는 채영식 시인의 거의 모든 시에서 볼 수 있다. 봄이면 찾아오는 이 악성 채권자 때문에 가만히 있기는 틀린 것 같다. 인생의 부채를 갚기 위해 이제는 일어서야겠다.

<김동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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