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2-03-06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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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영글어 가던 호박에 입자국이 생겼다
분명 사랑의 자국은 아닐 터인데 무엇을 저토록 확인하고 싶었을까
아이의 뺨에 난 손톱자국 같다
잘 영근 호박으로 떡을 해먹고 죽을 쑤겠다고
나날이 커가는 것을 보며 마음 든든했는데
이른 아침 나보다 먼저 맛보고 간 입
토끼든 두더지든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단단한 껍질을 갉아먹었을까
내 입만 생각하다 남의 입자국을 본 날
사막에서 살아야 하는 치열함을 보았다
개들의 감시를 피해 할짝거렸을 불안한 시선이 읽혀졌다
막막한 사막의 허기가 더 깊어져 보이고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바람이 내내 불었다
두 눈이 뻑뻑해서 나는 자주 깜박거려야 했다
살기 위해 먹어본 적 아득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굶어 죽어가는 영혼들이 있겠지
굶주림은 흉터가 되어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건조증을 앓는 이 땅을 햇빛이 달빛이 비추겠지
왜 입에서 떨어져 나온 모든 것에는 슬픈 빛이 머무는지 알 수 없지만
세상 모든 입들은 한 길로 통하는 걸 알겠다

장종의(1966 - )
‘내 입만 생각하다 남의 입자국을 본 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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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 입, 내 가족의 입을 챙기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호박의 단단한 껍질에 토끼인지, 두더지인지는 모르겠으나 먼저 입을 대고 맛을 본 어떤 생명체의 입자국을 본다. 내 입만큼이나 다른 누군가의 입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애플 밸리에서 대추농장을 가꾸는 장종의 시인은 농사를 지어 자신의 입을 먹여 살리면서 다른 사람의 입에 시를 넣어줄 수 있었나보다. 시인이 될 수 있었나 보다.

<김동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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