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약속의 무게

2012-03-05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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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여행길에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 일이 있었다. 안을 둘러보니 예상과 달리 조용했고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느긋하게 화장실문 앞에 서서 안에 있는 사람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간 서 있자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입구를 쳐다 본 순간 “아차, 내가 실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들은 모두 문 입구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나는 그 줄을 보지도 못하고 안으로 뛰어 들어와 한국식으로 화장실 문 앞에 서서 기다렸던 것이었다. 내가 학생시절에 미국 땅에서 사회적 약속이 생활 속에 녹아있는 현장을 목격한 여러 사례들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사회적 약속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학습은 가정교육에서 비롯된다. 부모들은 자녀들과 여러가지 약속을 해 가면서 공부 하도록 자극을 주기도 하고 예절바른 행동을 가르치기도 한다.


우리 가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부모와 자녀 간의 약속은 성적이 올라가면 무엇을 해 준다거나 숙제를 잘 하면 무엇을 사주겠다고 하는 등 얼핏 보기에 하찮은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자녀들은 부모가 제시한 약속을 굳게 믿고 할 일들을 다 해놓고는 약속된 것을 기다린다. 그러다가 “성적 올라가면 해준다던 것을 왜 안 해 주느냐” 고 묻기라도 하면 대개는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지 사주기는 뭘 사주느냐”고 타박을 하기 일쑤다.

이때 자녀들의 허탈감, 부모에 대한 섭섭함 등의 경험이 반복되면서 급기야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믿지 않게 된다. 꼭 학습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행동은 반복하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행동심리이다.

우리는 증자의 예화에서 말과 약속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 어느 날 증자의 아내가 시장엘 가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엄마를 따라 가겠다며 칭얼거렸다. 이를 귀찮게 여긴 증자의 아내가 아이들에게 “집에서 사이좋게 잘 놀면서 기다리면 돌아와서 돼지를 잡아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시장으로 떠났다.

마침 집에 있던 증자는 아내가 아이들과 이야기 하는 것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시장에 갔던 아내가 돌아와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뒷마당에서 돼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증자의 아내가 놀라서 밖으로 나와 보니 증자가 돼지를 잡으려고 우리 안에서 꺼내고 있었다. 깜짝 놀란 아내가 물었다.

“아니 왜 돼지를 꺼내십니까?”
“당신이 아이들에게 사이좋게 놀고 있으면 돼지를 잡아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아니.. 그건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달래려고 한 말이잖아요. 내가 언제 진짜 돼지를 잡겠다고 했어요?”
이에 증자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입에서 한 번 나온 말은 바꿀 수가 없는 법이오. 더군다나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어미가 자식을 속인다면 앞으로 이 아이들이 누구의 말을 믿겠소”.

부모의 입에서 나온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이러한 경험들이 쌓여서 어린이들의 사회화 과정을 돕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약속이 지켜지는 가정, 학교 그리고 사회가 바로 정의의 사회이며 행복한 가정, 건강한 청소년들을 길러내는 희망찬 사회가 아니겠는가?


이규성/ 가정상담소 프로그램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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