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스페인 에르낭 코르테스의 가주 탐험

2012-01-2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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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리포니아 이야기②

▶ ■ 잔 김의 길 따라 배우는 스패니시 [42]

캘리포니아 이야기를 시작함에 있어서 에르낭 코르테스(Hernan Cortes de Monroy y Pizarro)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에르낭 코르테스(스페인 탐험가, 정복자, 1519년 아즈텍을 점령했다)가 멕시코를 점령한 1519년부터 캘리포니아 탐험을 시작한 1539년까지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컬럼버스의 우선적 목표였던 인도항로 개척은 부차적 목표로 전락돼 버렸다. 이제 아메리카를 탐험하는 유럽인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신대륙에서 황금을 얻는 일이 되었고, 코르테스가 점령한 멕시코시티는 스페인의 전진기지가 돼 엘도라도(El dorado·황금의 도시라는 스페인어)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1527년 갑자기 아메리카의 대법관인 루이스 폰세 데 레온(Luis Ponce de Leon)이 코르테스의 행위를 낱낱이 조사한 후에 그의 지위를 박탈하고 체포했다.


루이스 폰세 데 레온의 뒤에는 쿠바 총독인 Diego Velasquez(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있었는데, 당시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와 정적의 관계였다(멕시코 본토로 탐험하여 들어가는 과정에서 코르테스와 벨라스케스 사이에 의견이 대립, 1519년 2월15일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11척의 배와 500명의 병사, 약간의 말과 개, 대포를 갖고 아즈텍 왕국을 정복하였다).

1528년 마침내 코르테스는 월권혐의로 파면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스페인으로 돌아간 코르테스는 스페인 국왕인 카를 5세가 주재하는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코르테스는 스페인 국왕에게 그의 영토에서 생산되는 모든 작물의 5분의 1 이상을 세금으로 바친 것은 물론, 멕시코를 유럽풍의 도시로 재건축한 것 등을 증명하여 무혐의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국왕으로부터 아즈텍 정복 공로를 인정받아 1529년 국왕은 그에게 ‘옥하카의 공작’(Marques del Valle de Oaxaca)이란 작위를 수여함과 동시에 그의 집안을 하급 귀족에서 고급 귀족으로 상승시켜 주기까지 하였다.

그는 그런 직위와 함께 신대륙에서 상당한 규모의 탐험선을 이끌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는데 이는 당시 그 누구도 누릴 수 없었던 권세였다.

1530년에 코르테스는 멕시코로 돌아왔으나 멕시코에는 이미 누뇨벨트랑데 구스만(Nuno Beltran de Guzman) 이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으로 임명되어 있었기 때문에 코르테스는 탐험대장의 지위만 유지되게 되었다.

이 당시 구스만은 한 인디언 포로로부터 북서쪽 방면의 금과 은이 굴러다니는 황금의 일곱 도시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코르테스 역시 칼라파 여왕의 섬나라 캘리포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북미대륙 탐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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