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2-01-26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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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꽃이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명절날 선물 꾸러미 하나 들고 큰고모 집을 찾듯
해진 고무신 끌고 저물녘 억새꽃에게로 간다
맨땅이 아직 그대로 드러난 논과 밭 사이
경운기도 지나가고 염소도 지나가고 개도 지나갔을
어느 해 질 무렵엔 가난한 여자가 보퉁이를 들고
가다 앉아 나물을 캐고 가다 앉아 한숨을 지었을
지금은 사라진 큰길 옆 주막 빈지문 같은 그 길을
익숙한 노래 한 소절 맹감나무 붉은 눈물도 없이
억새꽃, 그 하염없는 行列을 보러 간다
아주 멀리 가지는 않고 내 슬픔이 따라올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억새꽃도 알고 보면 더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이다
제 속에서 뽑아 올린 그 서러운 흰 뭉치만 아니라면
나도 이 저녁 여기까진 오지 않았으리

유강희(1968 - ) ‘억새꽃’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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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꽃들이 모여 있다. 명절날 선물을 싸들고 찾아가야 할 큰고모네 집처럼 그리 멀지도, 그리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마을과 두고 있다. 억새꽃이 걸어간 길은 우리들의 부모와 이웃들이 무수히 걸어갔던 바로 그 길이기도 하다. 눈물과 한숨의 마을로부터 멀리 떠나고자 했지만 마음은 늘 아주 떠나지 못하는 억새꽃. ‘그 서러운 흰 뭉치’가 우리 이민자들을 닮았다.

<김동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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