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저 차베스 ② 불평등한 이민정책 철폐에 한 평생

2011-12-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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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잔 김의 길 따라 배우는 스패니시 [37]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어린 나이부터 시골 농장에서 막노동으로 살아가던 차베스에게 군대생활은 새로운 삶을 가르쳐 주었다. 비록 갑판에서 페인트칠을 하는 군 생활이었을망정 조직과 단체생활, 인간관계 등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차베스는 초등학교 동창생과 결혼하여 샌호제에 정착했다. 7명의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서 농장에서 근무했었는데 노동자의 환경개선을 요구하다가 농장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1952년 Community Service Organization(사회봉사 연합회)에서 일을 하면서 행정업무는 물론 인권문제와 이들을 대변하고 변호하는 등의 많은 것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958년 그의 나이 31세에 이곳의 책임자로 승진되었다. 1962년 그를 이끌어준 동료 돌로레스 휴엘타(Dolores Huerta)와 함께 지금의 United Farm Workers(농장노동자연합회, UFW)의 전신이었던 National Farm Workers Association(국가 농장근로자협의회)을 설립하였으며 1965년 9월8일 필리핀 노동자들의 델라노 포도농장 파업(Delano Grape Strike)이 발생하자 이들을 보호하고 두둔하며 델라노에서 새크라멘토까지 행진시위를 이끌기도 하였다.

결국 이 비폭력적인 파업으로 농장주들과의 협상안이 조건부 찬성으로 동의를 얻어 내었고 노동자들의 복지문제까지 해결해 내는 계기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그는 평생을 남의 어려운 삶을 대변하며 살았는데 불평등한 미국의 이민정책 중의 하나였던 Brasero Program의 철폐를 요구하며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은 1942년부터 발효된 이민법으로 미국인 노동자를 우대하고 이민 노동자를 착취하는 취지의 프로그램이었는데, 외국 출신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농장의 활성화를 꾀하는 정책이었다.

이 노력으로 이 프로그램은 철폐됐고, 그 후 그가 속한 UFW는 1973년부터 시작된 서류미비 이민자들의 구제방안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여 1986년의 연방법령(1986, Federal Immigration Act)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차베스는 1993년 4월23일 야채 농장주들에게 항의하기 위해서 애리조나의 샌루이스에 갔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1992년 차베스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지구평화상(Pavem in Terris Award)을 받았으며 1994년 9월8일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도 받았는데 그때는 그의 미망인 헬렌 차베스가 대리로 받았다.

사회정의를 위한 그의 투쟁을 기리어 1973년부터 오리건주의 마운트 앤젤 칼리지(Mount Angel College)가 최초로 그의 이름을 따서 스패니시 이름인 Colegio Cesar Chavez로 바꾸어 치카노식 교육방식을 채택함을 시작으로, 캘리포니아의 롱비치, 모데스토, 새크라멘토, 샌디에고, 샌호세 등의 수많은 공원이 그의 이름으로 채택되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워싱턴주의 시애틀, 텍사스주의 아마리요시 등에도 그의 이름을 따서 공원이 건설됐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딴 공공시설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추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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