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군 잘못된 정보에 가주 수도 점령

2011-11-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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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김의 길 따라 배우는 스패니시 [32]

알바라도 스트릿 ③

캘리포니아 주지사 알바라도의 재임시절인 1840년. 이때의 캘리포니아 정가에는 멕시코로부터 탈퇴하여 영국이나 프랑스의 일부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루머가 나도는가 하면 캘리포니아 북부에서는 소수 외국인 무리들이 캘리포니아의 독립을 주장하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주지사 알바라도는 즉시 미국인 출신의 주동자인 이삭 그래햄(Isaac Graham)을 체포하여 멕시코시티로 이송함으로써 외교적인 마찰을 빚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알바라도는 “캘리포니아는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한다거나 유럽 국가의 일원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는 자기의 입장 표명을 분명히 해 주위의 입방아들을 단호히 일축시켜 버렸다.

1841년, 알바라도는 새크라멘토 골짜기에서 불어나는 미국인의 이민 물결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당시 대륙을 횡단하여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는 새로운 미국인들은 과거에 도착했던 미국인들과는 많이 달랐다.

우선 새로운 미국인 이민자들은 가족 단위였고 스패니시를 배우려 하지 않았으며, 기독교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해마다 늘어나는 이들 아메리칸들은 그들 스스로도 “우리는 캘리포니안이 아닌 아메리칸이다”라며 멕시코의 법을 무시하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알바라도의 삼촌이며 정치적인 경쟁자였던 마리아노 바예호(Mariano Vallejo) 장군과 몬트레이 요새 사령관인 호세 카스트로(Jose Castro)도 알바라도의 의견에 동조하여 이들은 멕시코 정부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멕시코 정부도 미국인들에 대한 경각심으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텍사스의 경우(미국인들이 들어와서 살면서 독립을 선언하여 멕시코로부터 분리됐다)처럼 캘리포니아 역시 똑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멕시코 정부는 1842년 1월, 마누엘 미첼토레나(Manuel
Micheltorena) 장군을 새로운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임명하고 캘리포니아 방어 목적을 이유로 군대와 함께 파견했다. 그러나 그 군대는 범죄자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이었고, 비행을 일삼아 거의 통제 불능상태였다.

그런데 1842년 10월19일 몬트레이에 사는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창밖의 거리를 내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거리에는 성조기와 함께 미군이 진주해 있었기 때문이다.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 발발이라는 잘못된 정보로 인하여 캘리포니아의 수도인 몬트레이를 밤새 점령해 버렸던 것이다. 멕시코에서 보낸 마누엘 미첼토레나 군대는 아직 몬트레이에 도착하지 않았고, 군대가 없는 알바라도는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 사령관은 미-멕 전쟁 발발이 잘못된 정보였음을 파악하고 다음날 바로 군대를 철수시키는 해프닝을 벌였는데, 후대 역사가들은 “이는 바로 미국이 야심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라고 기록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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