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알바라도 스트릿 ② 1838년 알바라도 다시 12대 주지사로 임명

2011-11-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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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잔 김의 길 따라 배우는 스패니시 [31]

멕시코 정부는 캘리포니아의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파견을 고려했으나 알바라도가 멕시코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고, 결국 멕시코 정부는 1837년 12월 캘리포니아에서 인기가 높은 카를로스 안토니오를 11대 주지사로 임명해 사태를 매듭지으려 했다.

그러나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자 다시 후안 알바라도를 1838년 12월 12대 주지사로 임명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1839년 7월5일 캘리포니아 몬트레이(왕산이란 뜻의 스패니시)에 도착한 스위스 출신 존 셔터(나중에 골드러시의 중심인물이 됨)는 알바라도를 만나 새크라멘토(성체 또는 성스러움이란 의미) 지역을 불하받기를 요청하면서, 그곳에 제2의 스위스를 건설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멕시코는 정부는 캘리포니아 땅을 무상으로 나누어주던 시기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셔터가 원했던 지역은 인디언 거주 지역으로 미국과 영국, 러시아가 서로 마찰을 빚는 지역이기도 했다.

알바라도 주지사는 마침내 셔터에게 멕시코 시민권을 주고 난 뒤, 새크라멘토의 4만9,000에이커를 불하했다. 그 결정 이면에는 그가 중재 역할을 잘할 것이란 생각이 있었다.

캘리포니아에 진출해 포트 로스(Fort Ross)란 거주지를 건설했던 러시아는 1840년 철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바다표범과 물개 포획이 금지되고, 이 지역에서 생산한 식량을 알래스카에 공급하려던 것 역시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리건에서 생산되는 식량 등이 가격도 싸고, 알래스카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캘리포니아의 매력이 사라진 것도 주요 원인이었다.

결국 러시아는 셔터에게 3만달러에 거주지와 관련 모든 시설과 장비 등을 매각했다. 셔터는 이를 기반으로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을 개발해 새로운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음식과 생필품을 제공하는 대신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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