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엽이 떨어진 샹젤리제는 이브 몽탕이 부른‘ 오텀 리브스’의 가을 색에 젖어 쾌적 한 감기 몸살 기운을 내고 있었다. 관광객들 로 복작대는 샹젤리제를 걷자니‘ 네 멋대로 해라’ (Breathless)에서 “뉴욕 헤럴드 트리뷴” 하며 신문을 팔던 단발의 진 시버그가 금방 이라도 저만치서 날 향해 걸어올 것만 같았 다. 오래간만에 다시 찾은 파리는 이렇게 하 도 많이 영화에서 봐 낯이 설지가 않다.
오는 연말에 개봉될 만화영화‘ 틴 틴’(Tin Tin)과 4인 드라마 ‘카니지’ (Carnage)의 두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 로만 폴란스키와 의 인터뷰 차 지난 주 며칠간 파리엘 다녀 왔다. 샤를르 드골 공항에서 숙소인 플라자 아테네 호텔(올해로 개업 100년째)로 가는 길에 우뚝 선 개선문 주위로 차들이 맴을 돌고 있다. 차선 없는 길에 실타래처럼 엉킨 차들이 꼭 자크 타티의 ‘트래픽’의 장면을 닮았다.
호텔에 짐을 풀고 창의 커튼을 여니 파리 의 지붕 위에 벽돌색 굴뚝들이 옹기종기 버 섯들처럼 돋아났다. 난 긴 비행에 피곤했지 만 호텔을 나와 개선문을 향해 샹젤리제를 걸어 식당 겸 바인 후켓(사진)을 찾아갔다.
개선문 바로 가까이에 있는 후켓은 레마 르크의 소설 ‘개선문’의 비련의 두 주인공 라빅과 조앙의 단골술집이다. 둘은 여기서 사과 브랜디 칼바도스를 마신 뒤 서로 육체 를 불태웠는데 칼바도스가 최음제 구실을 한다. 소설은 샤를르 봐이에와 잉그릿 버그 만 주연의 동명영화(Arch of Triumph)로도 만들어졌다.
난 10여년 전 파리를 찾았을 때도 그랬듯 이 이번에도 후켓의 옥외 테이블에 앉아 칼 바도스를 한 잔 시켜 마셨다. 가슴 속까지 짜릿하게 술기운이 침투하면서 여객의 쓸쓸 함과 피로를 달래준다. 그런데 잔 밑을 간신 히 채운 술 한 잔에 20유로다. 아까워 병아 리 물마시듯 마시자니 나의 신문사 선배로 왕년에 파리특파원을 지낸 김승웅 형이 생 각났다. 그는 한국판 파리지앙으로 술이 거 나해지면 불어로‘ 고엽’을 부르곤 했다.
파리에 도착한 이튿날 할리웃 외신기자 협회(HFPA) 동료들과 함께 갸르 뒤 노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벨기에의 브뤼셀로 갔 다. 서울역과 런던의 워털루 역을 닮은 갸 르 뒤 노르는 ‘하오의 연정’ (Love in the Afternoon)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가는 게리 쿠퍼를 쫓아 오드리 헵번이 종종걸음을 치 던 곳이다.
벨기에는 만화책 시리즈 ‘틴 틴’의 작가 에르제의 고향으로 초컬릿과 ‘틴 틴’의 나 라다. 이 날 ‘틴 틴’ 퍼레이드가 열려 거리 가 대혼잡을 이루었다. 주마간산 식 도시구 경에 이어 벨기에 만화센터를 방문한 뒤 파 리로 돌아왔다. 밤 10시에 르 그랑 렉스 극 장에서 열린 ‘틴 틴’ 프리미어에 참석했는 데 너무 고단해 절반은 졸면서 봤다.
일요일은 가을 냉기는 다소 있었지만 따 스하고 청명한 날씨. 가로수의 남은 잎들이 수척한 과부의 수절처럼 매달려 있다. 스필 버그와 폴란스키와의 인터뷰 후 난 이번엔 프랑스 동료기자 에르베와 함께 또 후켓엘 들렀다. 다시 칼바도스에 에르베의 권유로 에스카르고(달팽이)를 안주로 들었다. 내 부 탁으로 에르베가 진짜 불어로‘ 고엽’을 불렀 는데 제법 괜찮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만치 선 개선문이 장엄하니 아름답다. 파리를 점령한 나치군 들이 개선문 앞을 행군하면서 꽤나 으쓱했 겠다.
호텔로 돌아와 잠깐 쉰 뒤 혼자 파리구경 엘 나섰다. 정처 없는 긴 산책이었는데 여객 의 즐거움은 바로 이 방황의 물음표와 불확 실성과 기대 그리고 이것들이 주는 스릴에 있다.
개선문 주위처럼 차들이 떼를 지어 맴을 도는 콩코드광장을 지나 센강을 따라 노트 르담을 향해 갔다. 센 강가에서 바라보니 에펠탑이 긴 창처럼 하늘을 찌르고 섰는데 내 가 보기엔 덧니처럼 파리 기분에 썩 잘 어 울리지가 않는다. 가로수들이 너도나도 가 을소리를 수런대는 강변에서 키스를 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훔쳐 담았다.
저녁이 깊어져 줄리엣 비노쉬가 나온‘ 퐁 뇌프의 연인들’의 장소인 퐁뇌프에서 걸음 을 멈췄다. 멀리 노트르담이 보인다. 다리 옆 의 카페 퐁뇌프에 들러“ 봉 스와르”하는 가 르송에게 위스키를 시켰다. 다리들을 거쳐 센강 좌우로 오락가락하면서 호텔로 돌아 왔다. 밤의 센이 로맨틱한데 혼자여서 일까 파리의 가을 기운이 피부를 파고든다.
파리를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가장 로 맨틱하게 남겨준 말은 ‘카사블랑카’에서 이 별이 서러워 우는 일사(잉그릿 버그만)에게 릭(험프리 보가트)이 하는 대사일 것이다. “위 윌 올웨이즈 해브 패리스” (We Will Always Have Paris). 글의 제목은 리즈 테일러 주연의 전후 파리를 무대로 한 비련의 드라 마 ‘내가 마지막 본 파리’ (The Last Time I Saw Paris)를 흉내 낸 것이다.
박흥진 편집위원/ hipark@korea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