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여 있는 우물

2011-10-26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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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은행들은 색다른 고민 에 빠져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배부른 투정처럼 들릴 만한 고 민인데 예금이 너무 많이 몰린 다는 것이 그것이다. 저금리에 도 불구하고 경제상황에 불안 을 느낀 사람들이 절약을 해 모 은 돈을 앞 다퉈 은행에 집어넣 고 있다. 지난 8월 한 달 동안에 만 은행 예금은 무려 4,290억달 러가 늘었다.

활발하게 대출이 이뤄지는 호 황기에는 높은 예금고가 은행의 실탄이 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 출수요가 별로 없는데다 기준도 까다로워진 때는 예금이 창고에 쌓여 있는 재고품처럼 부담스런 존재가 된다, 아무리 낮다고는 해 도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데다 보 험이다 뭐다 해서 이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 치 않기 때문이다.

은행 예금고의 급격한 증가는 미국인들이 소비를 줄이고 있다 는 확실한 증거이다. 이 같은 소 비억제와 저축증가는 절대적으로 소비에 의존하고 있는 미국 경제 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래서 소비하는 것이 곧 애국이라는 내용 의 메시지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 지만(어떤 칼럼니스트는 당장 주 머니를 여는 것이 곧 나라를 구 하는 일이라고까지 주장한다) 미래가 불안한 소비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현대 거시경제학의 문을 연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개별적으 로는 합리적인 행동이 전체적으로는 비합리를 낳는 현상을 지 적하면서 이것을 ‘구성의 오류’ 라고 불렀다. 가령 영화관에서 유난히 앉은키가 큰 사람 뒤에 앉은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시야 가 가려진 관객 입장에서는 일 어서는 것이 개인적으로 좋은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다음 사람도 일어나게 된다. 결국은 모두가 일어서고 여 전히 스크린은 잘 안 보이는, 그 러면서 다리는 다리대로 아픈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다.

경제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 진 구성의 오류는 현재 미국에 서 나타나고 있는 ‘저축의 역 설’ 혹은 ‘절약의 역설’이다. 살 림이 어려워졌을 때 절약을 하 고 저축을 하는 것은 아주 합 리적이고 바람직하다. 호황기에 흥청망청했다면 더욱 그렇다. 나의 안전과 행복을 극대화 하 는 선택이 된다.

이런 미시적 차원의 결정이 사회 전체의 이익과 조화된다면 최선이겠지만 아쉽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너도 나도 앞 다 퉈 절약모드에 들어가면서 돌고 돌아야 할 돈이 은행에 잠기게 되고 그 결과‘ 돈맥경화’가 초래 돼 경기회복의 속도가 한층 더 디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케인즈는 착실하게 저축을 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순진한 이웃집 할머니가 악독 기업가보다 경제에 더 나쁜 해 악을 끼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절약의 역설을 실감나게 설명하기 위해 든 극단적인 예이겠지만 모든 국민이 저축에 만 몰두한다면 거시경제는 위 축될 수밖에 없다.

이런 역설을 케인즈보다 100 년 이상 앞서 간파했던 조선의 학자가 있었다. 19세기 후반기 의 실학자 박제가이다, 그는 자 신의 실용주의 철학을 집대성한 책 ‘북학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단을 입지 않으니 나라에 비 단 파는 사람이 없고 그릇이 비 뚤어지든 어떻든 개의치 않으므 로 예술의 교묘함을 알지 못할 뿐더러 나라에 질그릇 굽는 곳 과 대장간이 없어진다.”

그러면서 박제가는 경제를 우물에 비유했다. 무릇 재물은 우물과 같아서 퍼서 쓸수록 자 꾸 새로운 물로 채워지는 것이 고 쓰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경제학 용어를 빌리자면 유효수요와 경 제순환의 중요성을 알기 쉽게 설명한 것이다.

현재 미국 경제는 박제가가 말 한‘ 고여 있는 우물’ 형국이다. 개 인들은 은행을 찾고 기록적 수익 을 올린 기업들은 고용은 외면한 채 이를 현금자산으로 쌓아두고 있다. 물이 계속 고이면서 우물 은 말라가고 있다.


버블붕괴가 보여주듯 분수를 모르는 소비는 경제를 갉아 먹 지만 합리적이며 균형 잡힌 소 비는 경제를 굴러가게 하는 연 료이다. 그런 만큼 정부의 경제 정책은 이런 소비를 유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그 하 나는 소비자들이 다시 지갑을 열도록 만드는 인센티브를 쥐 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회복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연방정부는 다양한 부양책을 시도하고 있지만 효과는 기대 에 못 미친다. 기계적인 예산균 형에 사로잡힌 탓인지 과감함 과 신속함을 찾아보기 힘들다. 내놓는 대책이란 것들이 꽁꽁 언 발에 오줌 누듯 찔끔한 것들 뿐이다. 또 워싱턴의 정쟁은 경 기회복에 대한 소비자들의 의 구심을 키우고 있다.

소비자들이 합리적인 소비를 위 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날은 언제 일까. 돌아가는 상황을 종합해 보 면 가까운 시일은 아니라는 암울 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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