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첩첩산중… 여기가 박수근의 고향이라네

2011-10-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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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찬열의 최전방지역 도보행진 <6> 양구

첩첩산중… 여기가 박수근의 고향이라네

양구는 오지 중에서도 오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산이 깊다. 한적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농가.

탄생 97주년 특별기획전 하마터면 놓칠 뻔
구워낸 도자기 자축파티서 맛본 막걸리 일품


횡단 여섯 째 날이다. 지도를 보니 펀치보울 지구, 피의 능선 전투전적비가 부근에 있다.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다.

걸어가다가 식당이 보이면 아침을 먹기로 했다. 삼거리에서 평화의 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언덕이 가파르다. 길 따라 핀 벚꽃이 어제 내린 비에 많이 졌다. 꽃 피었다가 난분분 꽃잎 떨어지고, 잎 났다가 잎 지면 한 해가 지난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저렇게 꽃 지는 모습을 보면서 두보는 <곡강>이라는 시에서 “꽃잎 한 점에도 봄이 가는데 / 바람에 만 점 꽃잎이 진다” 고 읊었다. 꽃을 빗대어 인생무상을 노래했다.

잠시 멈춰 앞을 바라보니 숨이 꽉 막힌다. 이 험산을 어찌 넘을꼬. 인적 없는 산길을 혼자 걷는다. 휘돌아 가는 길 따라 개나리가 흐벅지게 피었다. 갖가지 나무들이 아침 햇살 아래 제각기의 푸르름을 뽐내고 있다. 숨이 찬다. 배도 고프다. 잠깐 멈춰 비상식량인 스니커를 꺼내 먹었다.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간다. 반가운 김에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운전사가 무심하게 지나쳐버린다.

도고터널을 지난다. 600미터다. 이제부터 양구군 방산면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첩첩 산중이다. 산이 산을 업고 있다.

내리막길은 발길이 가볍다. 고개 밑 저만치에 음식점 간판이 보인다.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문 앞에 서성거리기에 ‘아침 됩니까아’ 큰 소리로 물었더니, ‘안 돼요’ 큰 소리로 되받는다. 이 한적한 산중 이른 아침에 누가 밥을 먹으러 오겠는가.

"반드시 1단 기어를 넣으세요"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을 막 지났는데 등 뒤에서 차 한 대가 끽 끼익 소리를 내며 급히 스쳐간다. 어, 어어 하는 사이에 맞은편 벽 쪽으로 미끌어지면서 꽈당 부딪친다. 달려가 보았다. 오른쪽 범퍼가 망가졌다. 두 사람이 타고 있다. 인천 사는 부부인데 군대 간 아들 면회 가는 길이란다. 시동은 걸리는데 범퍼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 남편이 보험회사에 연락하는 동안 아주머니가 심란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위로를 드리고 갈 길을 재촉한다.

벌꿀 따는 모습이 보인다. 얼굴에 망을 쓰고 꿀을 따고 있다. 수입이 어느 정도인가 물었더니 벌통 하나가 2만5,000원 정도 벌어준단다.

걸어가면서 오래 전 양봉업자에게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벌들은 겨울을 잘 지내기 위해 다른 집단과 통합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합봉을 시킨다고 했다. 세력이 약한 벌통 두 개를 합치는 작업이다. 합봉을 하기 위해서 두 그룹의 벌을 한 벌통에 넣고 그룹 사이를 신문지로 가로 막은 다음 그 신문지에 작은 구멍을 낸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구멍을 통해 서로 냄새도 교환하고 친하게 지내면서 결국 합봉이 된다고 했다. 그런 절차 없이 두 그룹을 벌통에 함께 넣게 되면 서로 적이 되어 물어 죽인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통일도 벌들이 합봉하는 것처럼 차근차근 해나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같은 핏줄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60년 이상 으르렁거리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벌들이 안다면, 인간들이 날짐승보다 못하다고 혀를 끌끌 찰것만 같다.

농가 텃밭에 쪽파가 푸르게 자라고 있다. 슬레이트로 지붕을 덮었다. 삽살개 한 마리가 나그네를 향해 짓는다. 가난한 농가의 푸근한 모습이다.

배가 고프다. 그러고 보니 스니커 한 개 먹고 지금까지 걸었다. 다리 밑 냇가 물이 맑다. 목도 마르다. 식당 간판이 보인다.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50대 초반쯤 보인다. 된장국을 주문했다. 어찌하다 보니 이런 골짜기까지 흘러들어 왔다고 말문을 튼다. 자꾸 말을 건다. 사람이 그리웠나 보다. 이 아주머니도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소설 몇 권 분량이 되는 분인가 싶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돌아보니 걸어온 길이 아득하다. 5691 백두산 신병교육대대 장병들의 합창소리가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린다. 신병들이 운동장 여기저기 구령에 맞춰 뛰고 있다. 저 젊은이들의 금 같은 시간이 좀 더 생산적인 일에 쓰인다면, 개인은 물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얼마나 좋을까.

‘방산 도자기 박물관’까지 왔다. 사무실로 들어갔더니 직원이 물 한 병을 건네준다. 플래스틱 물병에 ‘미아 찾기 캠페인’이라는 내용과 함께 미아 사진이 인쇄되어 있다. 아이디어가 좋다.

이곳 방산면은 고려시대부터 백자 원료 600년 역사를 이어온 곳이다. 이성계 발원문이 적혀진 백자가 금강산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흙이 도자기로 태어나는 전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장을 만나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가마터는 좀 떨어진 곳에 있는데, 오후에 도자기를 출시한다고 한다. 구운 그릇을 꺼내는 작업이다. 막걸리도 준비해 놓았으니 시간이 되면 들르시란다.

고장마다 독특한 자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난번 종단 때 들렸던 전남 강진과 영암, 그리고 경북 문경도 자기의 고장이라 선전하고 있었다.

양구는 화가 박수근의 고향이다. 그의 전시관이 양구에 있다는데 그냥 지나친다는 게 아쉽다. 파출소에 찾아갔다. 소장과 순경 두 명이 근무하고 있다. 혹시 관내 순찰을 나갈 계획이 있으면 함께 전시관에 다녀오고 싶은데 가능한 일이겠냐고 좀 무리한 부탁을 했다. 소장이 빙긋이 웃더니 함께 가주겠단다.

순찰차를 타고 박수근 미술관을 향한다. 경찰차는 처음 타본다. 소장에게 아침에 차 사고를 낸 부부 이야기를 물었더니 아들을 만나보고 벌써 돌아갔다고 한다. 방산면 인구가 5,000명 정도라고 했다. 시골이라 큰 사고가 없어 근무하는데 어려움은 없단다. 차로 가니 금방이다.

박수근 탄생 97주년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박수근과 조덕현’ 사실과 기억의 편린, 20세기 한국 여성사를 보다”라는 큰 배너가 입구에 붙어 있다. 조덕현의 초상과 박수근 대표작 ‘아기 업은 소녀’가 배너 양 편에 크게 배치되어 있다. 아담한 미술관이다. 박수근은 이곳 양구 공립보통학교 출신이다. 독학으로 공부하여 일제시대 선전에서 입선하고 국전에서 특선을 했다. 대표작으로는 ‘빨래터’ ‘나무와 두 여인’ ‘아기 업은 소녀’ 등이 있다.

한 지역이 특출한 예술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양구가 그렇다. 양구군 방산파출소 이성빈 소장님. 그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귀한 미술관을 보지 못하고 지나칠 뻔 했다.

도자기 출시현장을 보고 싶어 서둘렀다. 다리 건너 빤히 보이는 곳이다. 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를 꺼내고 있다. 간단한 제사의식이 있다고 했는데 이미 마쳤는가 싶다. 꺼낸 도자기를 진열해 놓았다. 백자다. 색이 곱다.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자기들이다. 이번에는 쓸 만한 놈을 몇 개 건졌다고 관장이 말한다. 작업을 마치고 둥그렇게 둘러 앉아 자축파티가 열린다.

곤달비, 곰치 등, 산나물과 삼겹살에 막걸리 한 잔이 일품이다. 옆에 앉아 있는 비구니 스님께 한 잔 권했더니, 견식만 하겠다며 조용히 웃으신다. 양구 등운사에 계시는데 오늘 도자기 출시를 보러 일부러 내려왔다고 한다.

배불리 잘 대접받았다. 또 길을 재촉한다. 옛날 김삿갓이 이렇게 팔도를 유람했을 것 같다. 재두루미가 냇가를 난다.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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