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최전방 오지에 고층 아파트‘상전벽해’

2011-09-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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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방 오지에 고층 아파트‘상전벽해’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펀치보울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을지전망대. 펀치보울은 수많은 국군과 미군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곳이다.

정찬열의 최전방 지역 도보횡단
<4> 강원도 원통

DMZ 평화생명동산은 통일의 산 교육장 역할
한국전 격전지 펀치보울엔 분단의 상흔 느껴져

저녁을 먹고 나서 차 한 잔 마시며 정성헌 이사장과 얘기를 나누었다. 한국 DMZ 평화생명동산은 DMG 일원의 생태계와 역사, 문화를 올바르게 보전하고, 그 가치를 널리 알리자는 취지로 세워진 교육기관이라 했다. 2009년에 준공했다. 지난해에는 6,000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고, 해외에서도 온다고 했다.
그는 46년생이다. 8년 전 위암수술을 했다. 생명을 믿고 자연에 맡긴다고 했다. 아픈 사람 스스로 건강법을 준수하고 교육하니 사람들이 믿고 따라와 주어 3,000명 이상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한봉 한 통에 6만원 하던 게 올해는 50만원으로 뛰었단다. 벌이 멸종되면 생태계가 문제된다. 환경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렇게 반 발자국씩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살만한 곳으로 변해간다.

횡단 넷째 날이다. 아침 5시30분 기상. 이사장과 함께 본관을 비롯해 5행 동산을 돌아보았다. 본관 지붕이 잔디로 되어 있다. 사람의 건강과 치유에 필요한 갖가지 약초와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신체 각 부분에 어떻게 필요한가를 설명해 놓았다.

서울에 사는 경춘이 아우가 가족과 함께 이곳까지 찾아왔다. 속초에 일이 있어 가는 길에 들렀단다. 어제 멈췄던 원통 성당까지 함께 차를 타고 나왔다. 8시40분, 아침에 나왔던 길을 거슬러 다시 걷기 시작한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니 원통이 한 눈에 보인다. 왼쪽 작은 길에 ‘누구나 하기 싫은 일? 그러나 누군가 꼭 해야 할 일? 우리가 하겠습니다’는 파란색 배너가 길가에 서있다.
을지부대 앞을 지난다. 장병들이 사격훈련을 하는 모양이다. 총소리가 콩 볶듯 한다. 부대 근처 밭에서 농부들이 옥수수 모종을 심고 있다. ‘산불조심은 산과의 약속’ 배너가 곳곳에 붙어있다. ‘신병교육대 퇴소식을 환영합니다-달빛소리마을 주민일동-’이라는 배너도 보인다.

부부가 밭일을 하는데 엉덩이에 뭐가 달려 있다. 자세히 보니 앉을 때 사용하는 이동식 의자다. 재미있다. 옛날에 앉아서 논 밭일을 할 때 저런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필요하면 만들어지게 되는 모양이다

노인 부부가 밭갈이 작업을 하고 있다. 쉴 참 인성 싶어 나도 멈췄다. 나이를 물으니 올해 72세란다. 농산물 값은 그대로인데 공산품이랑 전기세가 많이 올라 살기가 힘이 든다고 한숨이다. 쌀 한 가마에 18만원 정도로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단다.

FTA 얘기를 꺼내자 “미국이 자기들 유리하게만 하려고 해서 문제야, 정치를 잘해야 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정치, 경제 막히는 게 없는 분이다. “이번 도지사 선거에 최문순 뽑은 거 잘한 거여, 옛날에는 여당 말뚝만 박아도 되얏는디 요즘은 안 그래. 그리고 이 지방이 옛날 김대중이 뽑았던 곳이에요. 국회 문턱에도 못 가보고 5.16 나서 그냥 말았지만…”


그랬다. 노인의 말대로 김대중은 인제군에서 두 번 낙선했다. 세 번 만에 당선이 되었지만 5.16 군사혁명으로 허사가 되었다. 그랬던 그가 후일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제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점심 배달차가 온다. 논밭에서 일하면서도 음식을 주문해다 먹는 모양이다.
얼른 자리를 떴다. 지나는 사람을 불러 새참을 나누어먹던 아름다운 풍경이 사라져가고 있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비득 고개를 넘어간다. 길 양 옆으로 커다란 시멘트 덩어리를 만들어 올려놓았다. 건드리면 금방 넘어질 것만 같다. 유사시 탱크 저지용이라 했다.

서화면 천도리 앞을 지난다. 냇가 산책길에 젊은 엄마와 초등학생 꼬마가 손을 잡고 걸어간다. 아들 녀석이 나를 보더니 “어, 엊그제 티비에 나온 그 아저씨다!” 아는 체를 한다. 아주머니가 “힘들지 않으세요” 인사를 건넨다. KBS 뉴스를 본 모양이다. 매스컴의 영향력이 대단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어린이 날이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까마득히 먼 옛날이 되어버렸지만, 나도 저렇게 어머니 손을 잡고 깡충거리며 걷던 날이 있었다. 어머니. 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정채봉 시인이 쓴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 아니 아니 아니 아니 /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 단 5분 /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 원이 없겠다 //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 젖가슴을 만지고 / 그리고 한 번 만이라도 / 엄마! /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 숨겨놓은 세상사 중 / 딱 한 가지 /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 엉엉 울겠다”

서화 초등학교 앞에 도착했다. 어제 만났던 천도리 이장 장근세씨가 기다리고 있다. 정부로부터 민통선 야산 8,000평을 임대하여 장뇌삼, 더덕, 고사리 등을 기르고 있는데, 농장에 가보시겠냐고 묻는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지만 따라나섰다.

트럭을 타고 출발했다. 30분쯤 올라가니 철망이 보인다. 더덕, 곰치, 장뇌삼, 고사리, 도라지, 제비꽃 등을 심어놓았다. 삐쭉 삐쭉 싹이 올라오는 것도 있고 제법 굵게 자란 놈도 있다. 장뇌삼 한 뿌리를 캐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이놈이 한 뼘쯤 자라려면 몇 년을 공들여 관리해야 한다. 벌통도 놓여 있다.

농장을 둘러보고 나서, 양구군 해안면 펀치보울을 다녀오자고 한다. 내일 해안면 쪽으로 걸어 갈 것이지만 제4 땅굴과 을지전망대는 걸어서는 갈 수 없는 곳이니 오늘 차로 다녀오자는 얘기다. 이장님이 바쁜 시간을 틈내어 나그네를 배려해 주고 있다.

자동차로 가니 금방이다. 제4 땅굴 앞에 개 동상이 서있다. 충견 헌트의 동상이다. 땅굴 수색작전 당시 부대원을 대신해 산화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설명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땅굴이 발견되기까지의 이야기와 6.25로 인한 피해상황, 그리고 당시의 빛바랜 문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간에 쫓겨 을지전망대를 향해 바삐 달렸다. 구불구불 산등성이를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해안면을 내려다보니 과연 펀치보울 형상이다. 펀치보울. 6.25때 외국 종군기자가 인근 가칠봉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화채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전쟁 당시 미군 비행사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주먹으로 뻥 쳐서 움푹 패인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다. 한국전쟁 때의 격전지다. 피아간 5,0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낸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여의도의 여섯 배가 넘는 면적이다.

전망대에 서서 남쪽과 북쪽을 번갈아 내려다본다. 눈 아래 아스라이 펼쳐지는 산천. 철조망을 경계로 둘로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다. 저 땅은 원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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