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추석 밥상이 주는 미덕

2011-09-19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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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한국에서 보낸다는 것은 나에게 큰 호사가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일로 비행기 표를 끊었지만, 비행기 표에 기재된 날짜에서 며칠만 더하면 추석이라니. 유난히 빨리 찾아온 이번 추석은 내가 한국을 찾은 속사정이야 어찌됐건, 미국에서 살면서 한국의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있게 된 첫 번째 추석이었다.

휘영청 밝은 달을 볼까 싶었지만, 올 여름을 강타했던 장마의 끝은 뭐가 그리
아쉬웠는지 그 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한바탕 빗방울을 떨어뜨리고도 물먹은 솜 마냥 무거운 구름을 이불처럼 덮어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추석의 밤은 내가 기억했던 쾌청한 밤하늘과는 달랐다. 하지만 추석에 즐겨야 할 것이 송편만인 게 아니듯, 바라봐야 할 것이 둥근 달 만 인 것은 아니다.

온가족이 모여 기쁨, 근심, 계획을 한보따리 풀어 차린 추석 밥상에는 갖가지 반찬의 가지 수 만큼이나 가족들의 머리수가 있고, 가족들의 이야기가 차려진다. 추석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답답하기만 한 정치 이야기도, 야속한 장바구니 경제사정도, 세대차를 느끼게 하는 요즘 아이들의 학교 무용담도, 우리 어렸을 적 우스웠던 개구쟁이 형제들 추억들도, 부모님 젊으실 적 고생하셨던 경험담도 추석 밥상에 해마다 오르는 고정 메뉴이다. 역시 가족마다 존재하는 가족만의 설화는 해마다 되풀이되는 구전으로 세대를 거쳐 내려와 항상 밥상에서 도닥도닥 다져진다.


온가족이 모이는 큰 명절에 가족 드라마는 또 어찌 빠지랴. 누군가 하나는 토라져 엄마에게 혼쭐이 나 훌쩍이며 밥상으로 불려 앉혀지는 일은 다반사이며, 숨이 가쁘게 온 집안을 뛰어 다니다 밥상 위 그릇을 뒤엎은 어린 조카들은 한명이 머리라도 다쳐 울음을 터뜨려야 그제야 추석 밥상 앞에 앉은 제 엄마 품으로 찾아 들어간다.

그동안 섭섭했다며 톡 쏘아 붙이는 동서지간의 볼멘소리도 추석 밥상 앞에서는 염치없는 웃음으로 마무리 되고, 취직 못한 큰 삼촌도 결혼 못한 큰 고모도 추석 밥상 앞에서는 대학 못 간 큰 조카의 등을 두드려 주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추석 밥상은 그리움이며, 추억이며, 그래서 가족이다.

오랜만에 가족과 보낸 추석에 들은 추석다운 뉴스들은 귀향길이 얼마나 정체되는지, 귀성행렬은 또 얼마나 길게 예상되는지 등의 틀에 박힌 것들이지만, 추석에 만큼은 이런 올드(old) 뉴스(news)들처럼 반가운 것이 없다. 큰 일 없이, 큰 사건 없이 모두가 하루정도는 “한가위만 같아라”고 바라기 마련이지 않을까.

그래도 역시나 올 추석에 듣고 싶었던 뉴스, 해마다 반복되는 그 틀에 박힌 또 다른 뉴스인 배고픈 이웃에게 온정을 베풀었다는 뉴스를 듣지 못한 것 같다. 명절 때면 독거노인을 찾아 따듯한 시간을 함께 나눈다는 그 당연한 뉴스조차 올 추석에는 듣지 못했다. 추석 밥상에 둘러앉아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도 문득 이런 뉴스가 그리웠던 이유는 우리 이웃을 초청하지 못한 우리 가족만의 밥상이 왠지 미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추석에 잘 차려진 단골 뉴스들 중에서도 다른 뉴스들에 밀려 뉴스거리로도 오르지 못한 가난한 이웃에 대한 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산 위에 뜬 둥근달을 모두 나누고, 가족들 사이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나누고, 넉넉함을 나누는 것이 한국의 추석이 아니던가. 다음에 또 추석을 한국에서 보낼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추석 밥상의 미덕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나에게 던져 보는 질문이다.


문선영
퍼지캘리포니아
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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