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은퇴 후 삶을 묻는 이에게

2011-09-1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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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일상, 깨달음>

이 선생! 가을입니다. 벌써 가을입니다. 이 선생도 벌써 은퇴준비를 하신다는 편지를 읽으면서 저는 갑자기 그 편지지가 낙엽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군요. 이 선생도 벌써 가을의 문턱에 가까우셨군요. 하지만 이 선생! 제가 몇 년 먼저 했다고 해서 이 선생이 제게 은퇴준비의 가이드를 요청하신다는 것은 저를 한참 부끄럽게 합니다. 이 선생같이 박식한 분에게 만약 제가 어떤 조언을 드린다면 가을 들녘의 코스모스가 웃을 것입니다. 하지만 은퇴에 들면서 제가 느꼈던 짙은 후회감 몇 가지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게 이 선생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마는.

저는 은퇴에 들어서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그 시간 한 쪽이 자꾸 풀어져 사라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의 저쪽 끝에 신기루처럼 영원의 피안이 보이곤 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왜 신앙이 그처럼 절실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신앙생활을 해 오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진정한 마음으로 신의 손길을 잡았을 것입니다. 시간의 지평에 서서 영원의 피안을 확실하게 바라볼 수 없다면 지나온 삶이란 얼마나 서글픈 것이겠습니까?

다음으로 평소 더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 오지 못한 것이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이 선생도 느끼고 계시겠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지구의 삶에는 다양한 세계가 있었습니다. 정치의 세계가 있는가 하면 경제, 예술, 철학, 과학, 역사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들은 다양한 위성세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술만 보더라도 그 안에는 또 음악, 문학, 영상, 무용의 세계 등등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살아 온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마치 여행을 떠나듯이 저는 이 다양한 정신의 세계를 좀 섭렵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졸지 않고 책을 계속 읽을 수 있고, 폭 넓은 지식, 깊은 이해로 공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었습니다.


또 저는 사랑에 게을렀던 일이 후회스럽습니다. 제가 태어난 가문이나 시대, 그리고 사회가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일에 인색하고 서툴렀음을 고백합니다. 나를 스쳐간 많은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건 다 고마운 분이었고, 내가 살아오도록 공간을 제공해 준 자연은 더 없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저는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일에 부지런하려 합니다.

또 저는 나누는 일에 소심하고 무지했음을 고백합니다. 한사코 소유하고 독점하려 했던 지난날의 삶이 얼마나 춥고 부끄럽고 못난 것이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나눌수록 부요해지고 따뜻해진다는 것을 좀 더 일찍 깨달아야 했습니다. 어찌 물질뿐이겠습니까? 이해를 나누고 위안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고, 격려를 나누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따뜻해지고 부요해지는 길이었습니다.

끝으로 저는 청결 연ㅅ브이 참 많이 필요했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삶의 터를 깨끗하게 정리하기 위하여 살아온 공간의 청결, 관계와 거래의 청결, 의식과 사상의 청결, 먹고 마시는 일의 청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과감하게 버리고 삶의 짐을 줄여가다가 마침내 정결한 모습으로 영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맙고 아름답겠습니까?

이 선생! 여기 저의 다섯 가지 후회를 고백 드립니다. 부디 당신의 가을은 아름답기를….


송순태(카라미션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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