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저 멀리 북녘땅… 가슴저린 발길 내딛다”

2011-09-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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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서 서해까지’

▶ 정찬열의 최전방 지역 도보횡단| 강원도 고성 <1>

“저 멀리 북녘땅… 가슴저린 발길 내딛다”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 땅. 저 멀리 금강산의 끝자락 해금강이 보인다. 중국의 황사는 고성까지 불어와 시야를 방해했다.

“산과 산은 / 만나지 못하지만 / 나무와 나무는 / 달려가지 못하지만 / 너와 나는 무엇일까 / 산도 아닌데 / 나무도 아닌데 // 샘물과 샘물은 / 강에서 만나지만 / 강물과 강물은 / 바다에서 만나지만 / 너와 나는 어째서일까 / 샘물보다 더한 눈물이 있는데 / 강물보다 진한 핏줄이 있는데 ”.

김원태 시인이 쓴 ‘휴전선에서’ 전문이다.

휴전선. 한반도를 갈라놓은 서글픈 땅. 248km(155마일) 6,400만평의 넓은 땅. 찬바람이 몰아치는 동토의 땅이다.


1950년 6월25부터, 3년이 넘도록 한반도에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400만이 넘는 인명피해와 1,000만 이산가족을 남기고 국토의 80%이상이 파괴됐다. 그리고 휴전이 되었다. 전쟁도 평화도 아닌 어정쩡한 휴전. 155마일 휴전선이 그어지고, 양측 군대가 대치하는 지점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남북이 똑같이 2킬로 뒤로 물러났다. 이 지대를 비무장지대로 정했다. 그때로부터 60년이 흘렀다.

60년. 아이가 태어나 환갑을 맞은 세월이다. 그 긴 세월동안 누구도 그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야만 하는 땅이다. 분단과 통일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 그곳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갈 17일 간의 계획을 세웠다.


고성 길목엔 탱크부대 행진 ‘최전방 실감’
민통선 마을 4백여 주민 농사로 느긋한 삶
DMZ를 따라 17일간의 여행 힘차게 출발


2011년 4월25일, LA를 떠나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은 태평했다. 외국에서 걱정하고 초조해 하던 내가 무색할 만큼 평화로웠다. 여러 번의 경험으로 사람들은 이제 웬만한 자극에는 무관심할 만큼 단련되고 무신경해진 듯싶었다.

그리고 5월2일 이른 아침, 수원 시외버스 터미널은 사람들로 붐볐다. 국토횡단. 한반도의 허리띠인 휴전선을 따라 동해에서 서해까지 걸어가는 길. 그 여정이 시작되는 강원도 고성을 향해 떠나는 날이다.

속초행 고속버스를 탔다. 고국의 5월은 싱그러웠다. 차창을 통해 바라보니 산은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이파리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물길들이 만나 멈추는 곳에 호수를 이루었다. 물에 담긴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계절의 여왕다웠다.

속초에 내려 고성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동해바다가 보인다. 깃발을 든 군인이 버스를 세운다. 탱크부대가 훈련을 실시하는 모양이다. 여러 대의 탱크가 지나간 다음 버스를 통과시킨다. 자동차와 탱크가 함께 달린다. 전쟁과 평화가 길 위에 공존하고 있다. 휴전선이 가까워 온다는 실감이 난다. 고성군 간성읍에 도착했다. 고성군은 인구 6만 정도로 대한민국 맨 북쪽에 위치한 군이다.


2008년 실시한 군수선거에서 황종국 후보가 한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당선된 지역으로 유명하다. 노랑색 현수막이 눈에 확 들어온다. 보궐선거에서 엄기영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최문순 신임 도지사의 인사다. “감사합니다! 도민을 하늘처럼 모시겠습니다 -강원도지사 선거 당선인, 최문순-” ‘하늘처럼’이 아니라 ‘하늘로’ 모셔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작은 것 같지만 저런 차이 하나가 결국 큰일의 성패를 결정짓는다. 국민을 하늘로 여기는 정치인, 그게 본인과 나라를 함께 살리는 길이다.

김창천 사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2년 전 국토종단 때 그의 안내를 받았는데 이번에도 신세를 지게 되었다. 글을 쓰는 분인데, 20년 넘게 양계업을 하고 있다. 사람이 진국이다. 식으면 묵이 될 만큼 진한 진국이다. 해가 설핏한데 고성의 유명 사찰인 건봉사를 방문하고 싶어 김 사장에게 얘기를 꺼냈다. 바삐 차를 몰아 돌아본 다음 어둑할 무렵 돌아왔다.

김 사장 아내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바쁜 중에도 저녁식사를 정성껏 대접 해준다. 김 사장의 선배 차주호란 분과 우연히 자리를 함께 했다. 건축업을 하는데 미국에 누이가 살고 있단다.

식사를 끝나고 일어서려는데, 차 선생이 “제가 십만원을 드리면 실례가 되겠지만 횡단 중 음료수 사 드시라고 만원을 드리는 건 결례가 아닐 거라”며 만원짜리를 내민다. 그러실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쳐도 기어이 따라 나와 호주머니에 찔러준다. 만원 한 장에 따뜻한 정이 담겨 있다.

땅거미가 깔리고 있다. 오늘밤은 한반도 남녘 땅 북쪽 끝 마을, 현내면 명파리에서 잘 예정이다. 휴전선 인근 주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여 김 사장에게 미리 부탁해 놓았다. 민통선. 비무장지대 바깥 남방한계선을 경계로 남쪽 5~20km에 있는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민간인 출입 통제선’을 말한다.

김 사장과 함께 명파리에 도착했다. 어둡다. 그리고 적막하다. 이봉기(49)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마을 회관에서 지내도록 준비를 했는데 방이 크고 썰렁하여 감기 드실까 싶다며, 누추하지만 자기네 가게방에서 주무시란다. 평양면옥. 제법 규모가 크다. 금강산 관광이 끊긴 후부터 아예 문을 닫고 있다.

“관광객이 아니면 누가 여기까지 일부러 밥을 먹으로 오겠느냐”며 쓸쓸히 웃는다.

주인이 맥주를 내왔다. 한 잔씩 돌아가자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진다. 술이란 게 참 묘한 물건이다. 이봉기씨는 중학 3학년과 1학년 두 딸을 포함한 네 식구다. 민통선 안에 있는 땅 3만 평을 경작하는데 2만평은 대리경작이다. 농사일을 하려면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출입이 허용된단다.

한 해에 300가마정도 수확한다. 소작은 3.7제나 2.8제로 나누어 먹는다. 쌀값이 헐해 기계값, 농약, 비료 등을 제외하면 쌔빠지게 일만 하고 남는 게 없다고 했다.

마을은 153가구에 400여 명 주민이 살고 있다. 3분의2 정도는 외지인이다. 주민의 반 정도는 소작이라고 했다. 땅 투기 바람이 불었단다. 도시 사람들이 몰려와 땅 값을 올려놓았다. 땅 주인들은 농민에게 소작을 줘놓고 값이 오르기를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다. 시세를 물어보니 평당 30만원 정도란다.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야산에 고사리를 재배한다고 했다. 고사리를 기를 수 있느냐고 반문하니, 남쪽에서 고사리 뿌리를 캐다가 산에 뿌린단다. 유기농 인증을 받았고, 무농약 재배 농산물이라 잘만 되면 괜찮을 거라 한다.

얘기를 하다 보니 자정이 가까웠다. 이봉기씨가 가마솥에 물을 데워준다. 큰 가게 방에서 혼자 자게 되었다. 문을 잠그려고 물어보니 안 걸어도 된단다. 그렇지만 불안하면 걸으시라며 방법을 가르쳐 준다.

휴전선 최북단 마을의 밤이 깊어간다.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통에 잠을 좀 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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