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저쪽에서 사람 오는 소리가 들려 ‘열림’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꽤 연세가 들어 보이는 백인 할아버지였다. 80세쯤 되지 않았을까. 큰 키에 삐쩍 마른 몸. 손에는 비닐봉지를 쥐고 있었다.
퇴근길인 난 꽤나 피곤해 눈인사를 건낸 후 얼른 층수를 누르고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그 때 할아버지가 혼잣말처럼 말을 거신다. 운동할 겸 저 아래 쇼핑몰 안에 있는 수퍼마켓에 가서 마실 걸 사오는 길이라며 가쁜 숨을 내쉰다. 작은 엘리베이터 안에 할아버지의 숨소리와 영국식 영어가 낮게 깔린다.
어둑어둑한 저녁시간에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는 후덥지근한 이곳 날씨에 그 쇼핑몰까지 걸어갔다 오는 건 젊은 내게도 가벼운 산책이 아니다. 강도 높은 유산소 운동쯤 된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여러 언덕을 거쳐 올라와야 하는 꽤 높은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다. 높은 곳에 있는 덕에 저녁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한눈에 도시 야경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쇼핑몰, 식당가, 수퍼마켓 등은 걸어서 20분 남짓, 왕복 40-50분이 걸리는 곳에 있다. 게다가 그 길은 꽤나 경사진 오르막과 내리막이다. 그 길을 80세 정도의 할아버지가 걸어서 왔다 갔다 하셨으니 힘들만도 하다.
"운동 삼아 갔다 올만하긴 한데…갈 땐 내리막만 있고 올 땐 오르막만 있으니 더 힘들어…"
"그러게요. 인생처럼 말이에요…"
내리기 직전 나눈 할아버지와의 짤막한 대화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에 순간 나도 의아했다. 인생처럼 이라…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집에 들어와 내 대답을 곱씹어 본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섞여있는 게 인생인데, 내려갈 땐 항상 내리막 같고, 올라갈 땐 항상 오르막 같은 게 인생이란 생각에서 한 말일까.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올 때가 있다는 말을 흔히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올라갈 땐 항상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만 눈앞에 보이고, 내려갈 때는 가속도가 붙어 한없이 아래로만 향하는 것처럼 느낀다. 때론 올라가는 것이 힘겨움이 아닌, 지위와 성공을 의미하기도 하고, 내리막이 수월함이 아닌 실패와 추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반된 의미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오르막과 내리막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 - 백 미터만 더 올라가면 내리막이 나올 것을 알기에 조금 더 힘을 내서 나아갈 수 있는 것. 백 미터를 올라간 이후론 내리막이 있을 것을 알기에 내가 있는 위치가 전부가 아님을 알고 겸손할 수 있는 것.
언제부터인가 내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내 앞에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때론 더 외롭고 지치기도 하고, 누가 대신해줄 줄 수 없는, 내가 혼자 걸어 나가야하는 길임을 깨닫기도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할아버지처럼 혼자 빗속에서도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길. 그것이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처럼 조급하게 오르려하지 않고 끝이 보이지 않는 내리막이라고 해서 쉽게 낙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안다. 내리막의 끝은 또 다른 오르막의 시작이란 것을. 그리고 머지않아 다시 내리막이 나올 것이란 것을. 그저 조금씩 숨을 고를 여유와, 걸어가는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과의 조우에 기뻐할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그 길은 그리 험난하지도 외롭지도 않지 않을까.
김진아
광고전략가
쿠알라룸푸르 Young & Rubic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