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편지

2011-04-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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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 숲은 아직 첫봄의 밤, 날씨가 추웠겠지요? 여기는 포틀랜드의 4월 아침, 무수한 첨탑처럼 솟은 침엽수들이 안개 솜이불을 두텁게 덮은 채, 아직 아침잠을 털어내지 못하고 겉잠으로 돌아누워 있습니다. 지금은 6시 부근. 숲은 안개에게 아무 것도 감추고 싶지 않은 듯, 속살까지 스며드는 안개 이불에 몸을 맡겨두고 있습니다.

그 아래로 겨울을 견딘 낙엽수들이 촘촘하게 스크럼을 짠 채 서 있습니다. 그 앙상한 가지 끝이 엷은 적갈색으로 변하고 있는 걸 보면, 벌써 아기 잎새들이 태어날 준비를 마쳤나 봅니다. 포근하게 감싸주는 안개가 있어 나무들은 그 삭막했던 겨울 껍질을 깨고 연초록 움을 틔우는 용기를 내는 것이겠지요. 잎새들의 한 세상살이, 그 시작에는 억겹으로 쌓인 물방울들의 부드럽고 섬세한 쓰다듬음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이름없는 잎새 하나도 그렇게 무수한 축복이 있어 그 삶을 시작합니다. 비록 세상이 뒤숭숭하지만 첫봄 아침 안개 속에서 깨어나는 숲은 경이롭고 숭고해 보입니다.

이형! 이렇게 시작하는 첫봄의 아침은 우리를 은은한 향기에 취하게 합니다. 눈으로 흠향하는 향기를 아시는지요. 이른 아침 창밖으로 우윳빛 향수가 하염없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저 수억의 향수방울, 안개는 저 같이 무딘 사람에게도 하루의 시작을 경건하게, 또 상서롭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시간에 모니터 앞에 앉아서 가슴의 온기가 행간마다 서린 이 형의 편지를 여러 번 다시 읽습니다.


그 먼 거리에서 내 영혼을 적셔주는 이 형의 안개, 그 품, 그 마음…. 성취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약속이듯이, 만남보다 더 정겨운 것이 편지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떠한 것으로도 자리바꿈을 할 수가 없도록 소중한 것은 저에 대한 이 형의 배려입니다. 창밑에까지 가득 쌓여 있는 안개만큼 고마움에 묻힙니다.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누군가의 이해와 배려를 받을 때 가슴 뛰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이 지구에 와서 잠시 한 생애를 살다가 다시 떠날 때, 우리를 끝까지 미소 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가 받았던 이해와 배려의 추억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지구의 삶에서 이 형 같은 친구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설령 나를 섭섭하게 했던 사람일지라도 동시대를 같이 살다가는 소중한 이웃이었고, 그의 얼굴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래서 너와 내가 서로의 결점과 장점을 보완하고 상쇄할 수 있게 하는 이인삼각의 길동무가 아니겠습니까? 이 형이 내게 베풀어 준 그 이해와 배려 또한 나도 다른 이에게 그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는 숨은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봄을 맞이한다는 것은 어쩌면 단순한 자연의 변화를 만나는 것만이 아니고 이 지구 위에 나와 생명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내 의식 속에서 따뜻이 수용되고 소중한 존재로 꽃 피어나는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진정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는 황금이 아니고 사람이었습니다.

이형! 마침내 쟁반 같은 해가 안개 속을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숲들이 안개 솜이불을 걷어내고 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폭설과 홍수와 지진과 해일, 그리고 방사능까지, 지난겨울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아직 봄숲은 가슴에 묻어둔 희망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지구에 태어나 살아왔다는 것이 더 없이 행복한 아침입니다. 이 행복감, 이 형의 가슴에도 소복하게 담겨지기를….


송 순 태 (카라미션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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