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 그친 산봉우리 티없는 푸르름이

2010-11-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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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눈 속의 그 푸른 초원

임지나 <수필가>
알래스카를 가다

알래스카에 올 때까지 빙하에 대한 상식은 제로였다. 요세미티에 얼어붙은 손바 닥만한 글레시아를 먼발치에서 본 것이 내 경험의 전부다. 엄청난 자연의 지각변동이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연출해 낸 것이다. 그 지고한 세월 쌓아올린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옮겨와 우리 앞에 보여준다.

서프라이즈 빙하는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 안에 있는 여러 개의 빙하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푸른빛과 흰 빛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광기어린 기이한 색깔은, 섬뜩한 푸름이 가슴 속까지 얼어붙게 한다. 우리가 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왼쪽 가장자리의 빙하가 뚝 떨어지더니 물속으로 갈아 앉았다가 다시 떠오른다.



거대한 얼음의 물결이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바다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인간의 상상조차 허락하지 않는 자연의 도도함을 느끼게 한다.


알래스카 매입 수워드 국무 이름딴 도시
마법의 잠에 빠진 듯 적막감에 싸여
해발 1천피트에 펼쳐진 아이스필드 장관


그 장엄한 품속에 안겨볼 수 있다면 가슴속 깊이 고인 그리움이 풀릴 수 있을까. 억수로 퍼붓는 빗속에 몸이 다 젖어도 정신을 잃은 사람들은 그 황홀함에서 깨어날 줄을 모른다. 빙하가 저리 푸른 것은 파란 색은 얼음에 흡수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신은 우리에게 핏빛 빙하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그 오묘한 조화를 부렸는지도 모른다.

뱃머리를 돌려나오며 빙하가 가물가물 멀어질 때 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는 슬픈 연인처럼 그 곳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투어가 다 끝날 때까지 서러운 여인의 눈물인 듯 비는 끝이지 않았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터널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여기서 한 시간 반 정도 달리면 알래스카의 마지막 항구 수워드(Seward)에 도착하게 된다. 기름을 부어놓은 듯 수워드 하이웨이는 반질거린다. 양 옆으로 비단결 같은 초원이 보이는가 하면 어느새 파란 호수가 이어져 그림 같은 풍경이 계속된다.

잔잔한 물속에 거꾸로 잠긴 눈 덮인 산봉우리가 수줍은 처녀의 가슴처럼 흔들린다. 우리가 수워드시에 도착한 것은 6시쯤이다. 마법의 깊은 잠에 빠진 도시처럼 이곳은 조용하기만 하다.

수워드는 알래스카의 끝이다. 알래스카의 이정표(0마일)가 여기서 시작이 된다. 어제 미리 예약한 Edgewater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럽풍의 호텔이 쓸쓸해 보인다. 항구도시답게 배가 들어올 수 있도록 닻이 있고 긴 해안가는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하다.


비가 그친 바다는 낮게 가라 앉은 구름위에 눈 덮인 산봉우리만 길게 목을 빼고 그 사이로 하얀 폭포가 흐른다. 누가 오고가는 지 이 죽은 듯 조용한 도시는 짙은 안개 속에 묻혀 적막하기만 하다. 잔잔한 파도가 조용히 밀려와 해안가 자갈들을 간질인다. 새까맣게 눌어붙은 조개들이 파도에 씻겨 갈가 봐 바위들을 꽉 붙잡고 달라붙는다.

수워드는 지금도 많은 석탄을 세계로 수출하고 또 관광지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여기서 크루스를 타고 글레시아를 보거나 피싱, 하이킹 그리고 카약이나 래프팅을 즐기기도 한다.

수워드란 이름은 1867년에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일 때 거래를 성사시킨 ‘윌리엄 헨리 수워드’(William H Seward)의 라스트 네임을 딴 것이다. 그 분은 링컨 대통령과 앤드류 존슨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다.

720만달러에 58만6,412스퀘어 마일을 미국 영토로 사들이면서 1에이커 당 2센트를 치렀다니 지금 러시아가 가슴을 치고 통곡할 만하다.

나중에 금광이 발견 되고 무진장한 지하자원과 석유가 매장돼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인구 3,000명 정도의 조그만 수워드는 포드 페닌슐라 국립공원(Ford Peninsula NT Park) 안에 있는 도시다. 여기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운트 마라톤’(Mount Marathon)대회가 해마다 7월4일에 열린다.

아침에 일어나니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안개 낀 해안가를 사색에 잠겨 산책해 볼 만하다. 알라스카의 자연은 오염되지 않은 원래 모습을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좋다. 아침 8시30분쯤 돼 우리는 호텔 길 건너에 있는 ‘시 라이프’(Sea Life)센터로 들어갔다. 11만스퀘어피트가 넘는 이 수족관은 알래스카의 갖가지 바다 속 동물들과 생물들의 생활무대를 육지로 옮겨 놓은 곳이다.

이 센터는 1989 년 엑손 발데즈의 기름 유출 펀드로 지어진 건물이다. 2,000 파운드가 넘는 스텔라 시 라이언(Stella Sea Lion), 알래스카에서만 볼 수 있는 입이 빨간 푸핀 (Pupin) 이라는 아름다운 새, 엄청나게 큰 문어, 그리고 갖가지 졸리. 피쉬 등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바다 속의 세계를 여기서 볼 수 있다. 하늘은 솜을 깔아놓은 듯 하얗고 구름 뒤에 숨은 산은 숨바꼭질 하듯 봉오리만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시 라이프 센터를 보고 우리는 엑싯 빙하(Exit Glacier)로 방향을 잡았다.

수워드 하이웨이를 타고 북쪽으로 10분쯤 가니 바로 엑싯 글레시아 Visiter Center가 나온다.

1968년 4월17일, 열 사람의 등반대가 호머(Homer: 시 이름)를 출발해 투루울리(Truuli) 빙하 상봉인 6,612마일을 정복한 뒤 험난한 얼음산을 헤치고 수워드에 도착했다. 이 때 신문사에서 그들이 드디어 “나왔다”(Exit)란 말을 씀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Resurrection Glacier(부활)다.

입구에서 약 1마일반 정도 올라가니 빙하가 보이기 시작한다. 트레일 길은 티끌하나 없이 잘 정돈돼 있어 사뿐사뿐 딛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길 좌우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나무들이 키 재기를 하듯 밀고 올라온다. 산 밑의 광활한 평야는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 따라 길을 내 준다.

높다란 산 밑까지 다다른 강이 머리를 돌려 다른 곳으로 끝없는 먼 길을 또 떠난다. 그리고 또 다른 강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아! 여기가 신선들이 사는 무릉도원이 아닐까. 누가 이곳을 그 혹독한 겨울이 할퀴고 간 곳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 시간은 시련이 아니라 저 찬란한 생명의 태동을 준비하는 과정일 것이다.

엑싯 빙하는 케나이 마운틴 레인지에 ‘하딩 아이스 필드’ 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빙하다. 바다가 아닌 또 별로 높지 않는 곳에 이처럼 웅장한 빙하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딩 아이스필드’를 한번 트레일해 봄직하다. 엑싯 빙하에서 멀지 않는 곳으로 6~8시간이면 오를 수 있는 곳이다.

몇 발작 앞에 보이는 빙하는 연한 파스칼 색깔로 옥색 치마를 곱게 받쳐 입은 청순한 아가씨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빙하는 조각을 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하다고 한다.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한번 만져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그 충동을 참았다. 앞에 굵다란 로프가 가로막고 있었다.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사들인 수워드 대통령의 이름을 딴 작은 도시 수워드. 인구가 3,000명 정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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