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최덕광 박사의 지중해 크루즈 여행기(25) 나폴리, 이태리

2010-10-29 (금)
크게 작게

▶ 1500년 외세 시달려온 경제.군사 요충지

10월도 반이 가서인지 이태리 남부의 낮 온도는 60F로 내려가고 청명하다. 걸어 다니기에 좋은 날씨다. 아침 7시에 나폴리 (Naples)에 도착한 배에서 7시 반경에 내려 부두 앞을 지나는 콜럼버스가의 구멍가게에서 버스표를 사고 아침 출근 시간이라 만원인 트램을 타고 기차 중앙역에 왔다. 여기는 이태리에서도 풍광이 좋은 곳으로 알려지고 규모가 큰 고대의 유적지 두 곳을 안고 있는 곳이라 항상 관광객으로 분빈다. 이태리에서도 도둑과 소매치기가 많은 곳이다. 오직하면 좀도둑 소탕하고 쓰레기 제때에 치우겠다는 공약으로 지금의 시장이 당선 되었을까. ‘나는 신분증과 크레딧카드, 카메라, 지도 등을 갖고 있는 가벼운 차림이니 도둑을 맞을 리 없으나 마나님이 짊어진 쿠키와 사과와 바나나, 휴지, 물병 등이 든 묵직한 망태가 걱정되네.’

복잡한 대합실 옆에 있는 매표소에서 일인당 7유로로 소렌토 (Sorrento) 왕복 기차표를 샀고 이 표로 중간에 있는 폼페이 (Pompeii)를 둘러 갈 참이다. 30분마다 떠나는 4, 5칸짜리 기차이나 남녀노소로 꽉 찼다. 폼페이까지는 약 40분 정도 걸린듯 하고 역에서 5분 거리인 폼페이 루인스의 입구에 왔다.
폼페이는 CE 1세기때 도시 옆의 베수비오 (Vesuvius)산에서 대 폭발이 일어나 옆 동네 헤르크라니움 (Herculaneum)과 같이 22메타나 되는 화산재 속에서 1,700년간을 묻혀 있던 고대도시이다. 방사능으로 토기, 동물의 뼈 등 유물을 측정한 결과 BCE 8~6세기경에 세워진 도시였다. 년평균 250만 명이 입장한다는 이 유적지의 입구는 9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붐볐고 입장권 사는데
도 시간이 걸렸다. 이 고대도시의 지도를 보니 종횡으로 두서너 개씩 대로가 있고 그 사이에 소로들, 소로 양 옆으로 집들이 나열된 바둑판식이며 무질서한 현대도시보다 잘 정돈되어 있는 것 같다. 입구의 오른쪽엔 체육관과 노천극장, 출구 쪽은 공회당, 공중목욕탕, 주피터와 아폴로 신전들이 있었고, 로만의 저택 중에는 훌륭한 지붕도 있고 집의 바닥은 모자이크 된 것도 본다.

공회당의 건물들은 CE1세기 네로 (Nero)왕때 다 지어 졌다니 로마를 불태우고 전쟁해서 파괴하고 패륜도 저지르고 폭군질 하다 단명한 이 네로도 남긴 게 있네.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그의 석상을 여기에다 두면 격이 맞을 것 같다. 이곳은 단시간에 땅속에 묻혀 지금 보는 것이 그 당시 생활의 단면이다. 이 넓고 정돈된 또 우람한 도시를 돌아보니 로마제국의 영화로움도 여간 아니었던 것 같다. 도시의 모든 길은 돌길이고 공공장소의 건물벽에는 벽화와 조각, 각 집의 방이나 부엌에는 사용하던 도구, 재에 묻힌 머미들의 의상, 키우던 가
축, 과일과 채소들, 발효 시키던 와인병, 부인의 지갑에서 나온 동전 등 모두가 당시의 생활상을 알리고 있다. 1600년에 시작한 발굴에서 벽화 등에 사실적인 성적장면이 너무 많이 나와 당시의 풍조로는 발굴 작업을 계속 할수 없었다고 하며 다시 묻어 두었었다.


1750년경에 나폴리와 스페인 두 왕국을 지배하든 부르봉 (Bourbon)왕의 도움으로 발굴이 재개 되었고 본격적인 발굴은 불란서군의 점령시절인 1800년경부터 시작됐다. 2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되고 있었다. 석고나 수지를 이용하여 당시에 묻힌 파손된 사람들의 형상을 재현 시키는 작업도 현지에서 하고 있었다. 고대 로만들은 예사로 표현 했는지 몰라도 자주 발굴되고 있는 색정적인 조각과 벽화 등이 지금의 일반관중이나 내가 보기에도 좀 민망스럽다. 엄청났던 도시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환난의 주인공 베수비오산은 위만 파인 채 높이 서 나폴리만을 내려 보고 있다.폼페이를 나와 다시 험준한 해변을 따라가는 기차를 타고, 앞에 앉은 불란서에서 온 여자의 20년간 발굴에 참가한 얘기를 들으며, 소렌토로 왔다. 염소 머리 같이 생긴 반도의 귀 뒤쪽 절벽
위에 자리잡은 소렌토는 목 부분이 깊은 계곡과 험한 산으로 싸여 있다. 천혜의 방어지가 되겠지만 16세기 이곳을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군이 오토만 해군에 대패해 2,000여명이 어디론지 영영 잡혀 갔다고 하니 지형을 내세워 멋진 역사를 만든 곳도 아니다. 단지 수려한 주변경관으로 관광객이 많이 들락거리는 도시고 호텔이 많고 비싼 물건 값으로 주위를 깨끗하게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철로변에는 나무에 레몬이나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린 집들이 많았고 역에 도착해 사방을 둘러보니 뒤에는 높은 산이요 앞은 바다요 도시는 언덕져 평평한 곳이 별로 없다.

이곳에서 태어난 유명시인의 이름을 붙인 타소 (Tasso)라는 잘 꾸며진 구시가의 좁은 공원 주위에도 호텔, 음식점과 상점들이 많고 꽃들로 잘 가꾸어 놓았다. 해변 쪽으로 내려오니 국제호텔이라는 곳이 있었고 넓은 호텔로비에는 19세기초의 영국의 다수의 유명시인과 작가들, 독일의 괴테 (Goethe), 소련시대의 작가 고르키 (Gorky)등이 여기에 와 살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먼저 간 타소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던 가 보다. 구시가의 해변가 콤비발레 빌라라는 음식점 뜰에서 양쪽의 절벽 해안을 보니 풍광이 좋았고 옆에 선 몇 그루의 팜과 소나무가 정취를 더했다. 해안선에는 백사장이 없고 해풍을 쏘이고 일광욕을 하려면 방파제 바위위에 깔아 놓은 긴 의자를 빌릴 수밖에 없겠다. 다시 도시 중턱으로 올라와 몇 백길 밑의 계곡사이에 지어놓은 이상한 집을 보며 저 습지에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였으나 지형지물을 잘 이용한 건축물은 많았다.
뒷산 넘어 염소 가슴의 바다가엔 아말피 (Amalfi) 라는 동네와 염소 입 앞에 떠 있는 카프리 (Capri)섬도 이곳 못지않은 경관으로 훌륭한 휴가지로 알려져 있다. 둥근 해변을 따라 나폴리로 돌아오는 기차에는 운동경기 응원차 나폴리로 간다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많이 타 떠들기만 하지 한국학생들처럼 영리하지는 못한 것같고 한시간동안 한번도 눈에 차는 행동을 하는 애는 못보았다.

나폴리의 중앙역 옆에는 미국을 포함한 5대륙에서 용병등도 하며 이태리의 독립운동과 위상을 높인 가리발디 (Garibaldi)의 동상이 있다. 뉴욕을 위시해 이태리인들이 많이 사는 세계도처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고 한다. 나폴리는 남 지중해의 어느 도시 못지않게 오래 된 도시고 벌써 BCE 8세기에 희랍의 새 도시로 기록 되어 있었다고 하며 로마제국에서는 경제 교통 군사 등의 요충지 였고 폼페이나 헤르크라니움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BC 476년 로마제국이 고드족에 망할 때 마지막왕 어거스투루스 (Augustulus)가 피신한 곳일
만큼 믿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6 세기에는 비잔틴제국에 점령당하고, 노르만들이 시실리에 왕국을 세우고는 11세기 중엽에 이곳을 침탈했다.

폼페이에 있었던 공회당의 잔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