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찬비 머금은 데날리공원 청청한 자태여…

2010-10-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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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눈 속의 그 푸른 초원

임지나 <수필가>
알래스카를 가다


지평선으로 끝나는 푸른 들판과 흰 눈으로 백합꽃을 피운 높고 낮은 산들, 그리고 300만 개에 달하는 호수들은 알래스카의 방대함을 한 눈에 말해준다. 이곳에는 공식적으로 이름이 붙여진 호수만도 3,000개가 넘는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하얀 눈과 짚은 초록색 휘장을 벌리고 쏟아지는 폭포, 청록색 호수와 싱싱하게 뻗쳐오르는 나무들을 빼놓고 알래스카를 말 할 수 있을까. 이 무한한 자원과 오염되지 않은 천연의 아름다음을 함께 가진 알래스카! 미국은 진정 신의 축복을 듬뿍 받은 나라임에 틀림이 없다. 또 이 천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내가 이곳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알래스카에서 ‘허스키’라고 불리우는 개는 겨울철 교통수단인 눈썰매를 끄는 것은 물론 인명구조에도 투입되는 중요한 존재이다.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인 데날리 역에 도착했다. 9,500 스퀘어 마일, 600만 에이커가 넘는 이 광대한 공원은 세계에서 왕 중 왕으로 꼽힐만하다. 매서추세츠 주와 로드아일랜드 주를 합친 크기라고 하니 가히 슈퍼스타가 아니고 무엇인가. 아마 유럽의 어느 작은 나라보다 더 클 것이다.

또 북미에서는 제일 높은 2만320 피트의 그 유명한 ‘맥킨리’ 산을 비롯해 1만7,400 피트의 ‘포레카’ 산, 그리고 1만3,220 피트의 마운틴 ‘실버트론’ 이 이 안에 있다. 거기다 175 종의 희귀 새들, 그리고 40 종의 갖가지 희귀 동물이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묶을 프린세스 호텔은 뒤에 ‘레나나’ 강을 끼고 안개 낀 알래스카 산맥을 마주 보는 평화스런 풍경이다. 구름 뒤에 숨어 살짝 고개를 내민 알라스카 산이 촉촉이 젖어 이마에 닿을 듯 가깝다.

호텔 뒤로 흐르는 레나나 강도 그리운 임 찾아 가는 양 150 마일을 쉬지 않고 흘러간다.

차창에 흐르는 대 자연에 취해 기차를 타는 7시간 동안 지루한 줄을 몰랐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실개천들이 모여 호수를 이루고 그 호수들이 다시 강을 만들어 낸다. 크고 작은 산들이 들쑥날쑥 그네 뛰듯 밀려왔다 뒤로 밀려간다.
진주 같은 물방울을 달고 모래알처럼 많은 나무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간지러운 사랑을 속삭이듯 살랑댄다. 아무리 둘러봐도 인가는 보이지 않는다. 오직 태고의 자연만이 존재할 뿐이다. 크리스 맥켄들리스가 스템피드 트레일에서 왜 빠져 나오지 못 하고 죽어갔는지 알 것만 같다.

알래스카는 9월부터 시작해 거의 8개월 내지 9개월을 혹독한 눈 속에 묻혀 있는 셈이다. 여름이 시작되면 산더미처럼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사방에 흩어진 강들은 물살이 세지고 강물이 급속도로 불어난다. 아무런 장비없이 인적이 끊긴 자연 속에서 불어난 강물을 헤엄쳐 그 오지를 빠져 나올 수 없는 곳이 또한 알래스카의 와일드한 자연이다.

차창에 떨어지는 투명한 물방울이 내 가슴 속에도 끊임없이 흐른다. 기차가 지나는 철로 양쪽은 활짝 핀 고사리 밭이다.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있는 고사리 잎은 상그러운 처녀의 젖가슴처럼 부드러워 보인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면 사뿐히 그 잎 위에 설 것 같다.


알래스카의 기나긴 겨울은 이렇게 기름진 초원을 가꾸어 내기 위한 몸부림일까, 몇 개월도 안 되는 짧은 햇살에 저토록 풍요롭고 값진 삶을 살기위해 그리 긴 겨울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묵을 호텔은 모두가 통나무로 지어진 이층 목조 건물들이다. 이토록 많은 통나무 호텔을 본 것도 처음이다.

저녁은 ‘킹 살몬’(King Salmon) 레스토랑에서 뒤에 흐르는 레나나 강물 소리를 들으며 와인도 한잔 곁들였다. 이 밤처럼 분위기에 젖은 식사를 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식당 내부의 장식이 밖에 촉촉이 내리는 이슬비와 레나나 강물 소리 그리고 낮게 깔린 구름에 잘 어울린다. 한 잔의 와인 때문일까, 소리 없이 내리는 비 때문일까 왠지 오늘은 로맨틱해지고 싶다.


눈 녹은 실개천 모여 3,000여개 호수… 짧은 여름이 만들어낸 녹색의 비경


저녁을 끝낸 뒤 우리 세 여자들은 야외 자쿠지 (Hot Spa)에 따끈한 몸을 풀었다. 보슬보슬 내리는 이슬비가 가녀린 여인네의 목덜미를 간질인다. 구름 뒤에 살며시 숨은 알래스카 산이 비에 젖은 매끈한 여인네의 몸을 남모르게 훔쳐본다.

오늘은 정말 알래스카 날씨다. 비도 간간이 섞이고 바람도 상당히 쌔게 불어 겨울이 다시 온 듯하다. 웬만한 추위에는 끄떡하지 않던 나도 만반의 준비를 했다.

추운 날씨지만 부풀은 기분은 한시라도 허비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데날리 공원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여행(Tour)을 예약 시간이 늦어 놓치고 말았다. 항상 호텔에 들자마자 여행 스케줄을 확인해야 하는 것을 엊저녁에 깜박했던 것이다.

밖으로 나와 개들의 썰매 쇼를 보기로 했다. 개 사육장에는 팔등신처럼 잘 빠진 개들이 군데군데 매여 있다. 그들은 의외로 순하고 익숙해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때는 포즈도 취해 주는 듯했다. 눈이 없는 썰매 쇼는 좀 싱거웠지만 6마리의 개가 한 조가 돼 정해진 코스를 삽시간에 돌고 와 제 자리에 선다.

특히 데날리 공원에서 이들의 존재는 없어서는 안될 만큼 중요했다. 겨울에는 이개들이 공원을 지키고 물품을 공급하고 인명 구조도 도맡아 한다. 데날리 국립공원은 겨울에는 문을 닿는다. 워낙 많이 쌓이는 눈에 기차는 운행이 중지되고 차량 통행도 할 수 없다. 오직 썰매나 헬리콥터로만 통행이 가능하다. 이곳 사육장에는 30 마리의 개들이 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알래스카에서 빼 놀 수 없는 것은 3월에 열리는 이디타 썰매대회(Iditarod Trail) 다. 알래스카의 썰매 개들은 ‘허스키’라고 부른다. 이들은 철저한 다이어트로 체중 조절을 해 한눈에 봐도 스마트하고 잘 생긴 모습들이다. 사람으로 말하면 외모만 준수한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도 갖춘 엘리트다. 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떨치는 이 대회는 참가 자체가 힘든 대회다.

알래스카처럼 수 피트의 눈이 쌓이고, 험악한 지형과 얼어붙은 강, 그리고 몰아치는 바람으로 영하 수십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를 뚫고 달려야한다. 예측을 불허하는 날씨는 그들이 경기를 하는 동안 내내 싸워야 하는 힘든 경기다.

언젠가 Susan Butcher 의 얘기를 그린 영화를 본 적이 있다. 1,131 마일을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죽음을 무릅쓰고 장장 14일을 달려 당당히 일등을 차지한 인간 승리의 감격적인 영화였다. 여성의 장벽을 뛰어넘는 그녀의 불굴의 의지를 보며 가슴 조렸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1986 년의 우승을 계기로 4번을 우승해 세계적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녀의 인생 또한 눈 속의 거칠고 외로운 썰매만큼이나 드라마틱해 53세의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만큼 도전 의식을 갖고 인생을 완주할 수 있을까.


통나무로 지어진 호텔 뒤에 흐르는 레나나 강.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잘 간직된 울창한 산림지역이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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