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의 일기 - 서울 여자 경상도 남자

2010-02-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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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욱이 이야기

“아버지, 오늘 엄마 생신인데 꽃이라도 사 드려야지요.” “밥 같이 묵으면 되지 뭐할라꼬 꽃은 사노. 마, 어차피 시들 것을.” 나의 말에 못이긴 척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시더니 길가에 피어 있는 장미꽃 몇 송이를 꺾어 오셨다. “아버지, 오늘 밸런타인스 데이인데 엄마 초컬릿 하나 사다 드리세요.” “얼라(아린아이)가. 사탕이나 묵구로. 그게 다 장사할라꼬 하는기라” 나의 말에 또 못이기는 척 아버지가 편의점에서 제일 싼 초컬릿 하나를 사오셨다. “아버지, 맛있는 거 이거 엄마 좀 드리세요.” “손이 읍나(없나). 그냥 묵으면 되제. 퍼득 묵으라” “어버지, 엄마가 몸살이 나신 것 같아요.”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리마, 돌아 댕기드니 결국은 감기나 걸리고, 언능 이불 덮어쓰고 자그라!”

경상도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는 아버지가 엄마에게 다소 무심하면서도 무뚝뚝하게 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엄마, 어쩌다가 아버지 같이 멋없는 남자랑 결혼했어?” “연애할 때는 진짜 남자답고 멋지더라고.” “난 절대 경상도 남자 중에서도 무뚝뚝한 남자랑은 결혼 안 할꺼야!”

그런데, 이게 웬 운명의 장난인가! 나도 결국은 경상도 무뚝뚝이랑 결혼을 한 것이다. “여보, 밸런타인스 데이인데 꽃 안 사줘?” “니 그거 필요하나? 니 꽃 좋아했나? 니하고 안 어울린데이” “여보, 나 오늘 이뻐?” “니는 거울도 안 보나, 얼굴 함 봐봐라. 답 나오제~” “여보, 이거 좀 들어줘” “니 팔뚝 좀 봐봐라. 내 팔뚝보다 엄청시리 굵고마는 뭐 그리 엄살을 떨어싼노!” “여보 저기 좀 봐. 너무 멋있지?” “…” 사람들 앞에선 얼마나 점잖을 빼는지 거의 웃는 법이 없고, 경상도 중에서 경북쪽이니 무뚝뚝함의 결정체이다. 예의범절에 대해선 두말 할 것도 없다.


재미있으면 호탕하게 웃는 나와는 다르게 언제나 조용히 웃고,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나와 다르게 침묵을 일관하고, 아이들의 재롱에 흥분해서 박수치는 나와는 다르게 조용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경상도 남자의 가마솥같이 진국인 모습 때문에 아버지가 생전엔 남편을 무척이나 사랑하셨다. 당신의 아들보다 더 많이 닮은 성격인 사위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속 깊은 것 때문에 성격상으론 맞지 않는 부부이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단련이 돼서 그런지 서울여자인 내가 경상도 남자를 전부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기에 남편이 아무리 무뚝뚝이로 말을 해도 속마음은 아니란 걸 안다. “니는 내가 말로 해야 아나!”라는 남편의 말처럼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 그것이 진짜 부부다.


김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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