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한다, 미안하다, 고맙다

2010-01-0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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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비 배(CCM 의료재단 홍보이사)

미국에서 100년을 살아도 나는 결코 초현대적인 미국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고맙다’ 를 남발해 가면서 그 대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다. 공공기관에서 고위직 간부들에게 매니지먼트 트레이닝을 시키는 과정에서 한 컨설턴트가 한 말을 듣고, 내게 내린 결론이다. “21세기를 맞이하는 수퍼 미국 리더가 되기 위한 언어중에 가장 많이 이용해야 될 말은 사랑한다, 미안하다, 고맙다 라는 말입니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라 유전공학도였던 내 남편. 결혼하고 2년반 되던 어느날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 헤어지자. 호주 친정에 가 있으면 생활비를 송금하겠다.” “왜?” “너는, 나를 도저히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은 의미가 없다.” 그가 이혼 사유를 명료하게 표명했다. “뭐? 내가 갈 친정이 어디 있냐?” 나는 바로 따발총을 쏴댔다. “결혼 안하는 꿋꿋하게 살아
온 이 노처녀를 감언이설로 뉴욕까지 데려다 놓은 게 누군데?” “거기다 결혼하자 마자 직장도 때려 치고 너만 떠받치는데 무슨 날벼락 같은 사랑 타령이냐?” 하고 삿대질까지 해댔다. 혼자 펄펄 뛰다 또 벽력같이 소리를 쳤다. “ 내 사전에 이혼은 없다!” “이혼? 이혼하려면 너 혼자 해라.” 하고 앉아있던 의자를 ‘꽈당’내려치며 그에게 밀어 쳤다. 결혼 시장에서 인기 있던 그가 죽을힘을 다해 나를 언어라는 매개체로 녹여 결혼을 했으나 2년 반 동안 ‘사랑한다’를 언어로 표출하지 않는 나에 대한 반격이었으리라.


언어는 체계적인 의미를, 소리나 일반적인 심볼을 통해 대화하는 것으로 인간이 쓰는 언어는 생리적인 것 보다는 상징적인 대화시스템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 인간만의 유니크한 것이다. 국민의 대변이자 손발이 되는 정치인들도 이 언어라는 도구를 어떻게 투표자에게 적용해서 캠페인을 하는가에 당락이 좌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를 정복한 영웅 시저, 약한 자들에게 꿈을 실어준 마틴 루터 킹 목사에서 오바마 대통령까지, 뼈를 찌를 듯한 표현으로 언어를 구사한 섹스피어, 희대의 정치가 처칠, 이 모든 이들은 언어가 가진 최 극치의 표현을 구사함으로써 우리 각자에게 감동을 주었다. 우리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감사한 것 중에 하나가 언어, 말이 아닌가? 그런데 점차 이 소중한 언어를 모두 남발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말을 사용하는 지구촌의 한국인 모두에게 미국 문화, 미국언어들이 몰려 들어간 모양이다.

미국인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사랑한다, 미안하다, 고맙다’ 는 말들은 우리 모국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깊숙히 친숙해진 듯하다. 연인이나 친구간에 ‘사랑한다’는 말을 물먹듯이 해 댄다. 모국의 대통령도 군중앞에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미소를 머금고 해댄다. 오바마 대통령도 경제회복에 대한 사죄 ‘미안하다’를 방송에다 연거푸 흘려댄다. 내가 오랫동안 지켜 본 많은 노부부들, 평생을 눈의 언어로, 마음의 언어로 지내온 그분들에 비해 우리 미국인들이나 모국의 젊은이들이 사랑한다, 미안하다 고맙다를 되뇌어도 언어의 대화
는 잘 풀려지지 않고 있다. 자신의 부인에게서 골프채로 얻어맞고 자신의 부정한 행위를 무마하려 했던 골프황제 타이거우즈는 결혼 전 수없이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시작 혼외정사가 들통나자 미안하다는 말로 용서를 빌다간 급기야 돈으로 이혼을 입막음 시키고 ‘고맙다’는 말을 남발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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