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새 날들아, 같이 놀자”

2010-01-0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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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한 어린이가 묻는다. “새 해가 어디 있어요?”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요” “전에 보던 자연, 건물들,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아요” “두 귀를 활짝 열고 들어봐요” “전에 듣던 똑같은 소리만 들려요” “그럼 큰 소리로 불러봐요. 새 해야아 하고” “이게 뭐야. 흰 종이 한 묶음이 날아왔어요” “그게 바로 새 해지요. 모두 몇 장인지 세어봐요” “모두 365장이에요” “거기에 매일 할 일, 한 일을 그리면서 새 해와 같이 마음껏 놀아봐요”이 번에는 어른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도 놀고 싶지만, 일하면서 생활을 해야 하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일하는 것은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이거나 활동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일할 때의 즐거움은 독특한 것이지요. 따라서 아예 ‘놀자’로 말을 바꿔 버리는 게 지혜롭다고 생각하지요. 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지내는 것이 바로 일하는 것이라고” “말을 바꾼다고 어디 내용이 바뀌나요. 힘들기는 똑같을 텐데...”“확실히 바뀝니다. 청소하며 놀자, 기계를 돌리며 놀자, 글을 쓰며 놀자, 운전하며 놀자, 옷을 만들며 놀자, 물건을 운반하며 놀자, 학생들을 가르치며 놀자, 음식을 만들며 놀자, 집을 지으며 놀자, 병을 고쳐주며 놀자, 남을 도우며 놀자....” 이렇게 ‘놀자’라는 말을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말이 바뀌면서 그렇게 지루하고 싫던 일하는 것들이 하나의 즐거움 즉 오락으로 바뀌는 사실이다.


요즘처럼 모두가 ‘일’에 대하여 목마름을 느낀 적이 없는 것 같다. ‘일’이란 오직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한 방편이라던 생각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이란 정신적인 버팀목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생활비가 충분하더라도, 무보수 일이라 할지라도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굉장한 생각의 변화이다. 물론 생활비는 이럭저럭 해결이 되는 사람들이겠지만, ‘일’이 오직 그 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중요하다. ‘일’은 어떤 일의 지속적인 발전을 가져본다. 일은 창조적이고 연구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게
한다. 일은 진행과정에서도 기쁨을 안겨준다. 일은 여럿의 의견에 따라 성과를 올린다. 일은 끝냈을 때 성취감에 흠뻑 젖게 한다. 인류 역사는 사람들의 일손으로 이어졌으며, 앞으로의 역사도 크고 작은 일의 연속으로 진전할 것이다. 역사는 일의 집대성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일은 인생 자체이다. 그런데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있다. 이 같은 표현은 일하는 것을 고역으로 몰고 간다.

차라리 ‘일 안 하는 사람은 삶의 재미를 모른다’가 올바른 표현같이 느껴진다. 요즈음 젊은 늙은이가 되어 은퇴한 사람들은 다시 일거리를 찾고 있다. 삶의 즐거움이나 보람을 찾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일하다’는 ‘살다’ ‘즐기다’ ‘놀다’의 동의어가 된다그래서 어른들도 어린이들처럼 즐겁게 놀면서 새 해를 보내자는 것이다. 처음부터 존재하는 놀이감은 별로 재미가 없다. 새로운 놀이감을 창조하면 그 재미가 몇 갑절 더할 것이다. 놀이감
즉 일감을 찾아내는 것부터 시작하자. 놀이감을 정하면 그 일에 열중하며 실컷 즐기자. 우리는 제각기 놀기도 하지만, 여럿이 같이 놀자. 다문화 민족과 섞이면 다양한 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새해의 인사는 서로의 행복을 기원하는 덕담이다. 그 덕담에도 개성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흔한 말, 상업화된 말이 아닌 개인의 바람이면 인상에 남을 것 같고, 그 인사말에 남긴 정성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부자 되세요’ 같은 인사말은 서글프게 만든다. 거기에는 세속적인 ‘부자’의 뜻이 아닌 ‘마음의, 따뜻한, 좋은 글을 쓰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그늘을 비취는... 등의 형용사가 있으면 뜻이 달라질 것이다.새 해는 그 말 자체로 들뜨게 한다. 새 것에 대한 밝은 바람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맞이하는 새 해지만 깨끗한 물로 세수하고 해말갛게 된 얼굴로 맞이하고 싶다. 그리고 마음껏 놀고 싶은 새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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