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월츠(Waltz)를 가슴에 품고

2009-12-3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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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옥(MoMA 근무)

고등학교시절 어느 날, 내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장래 배필의 조건이 반짝 떠올랐다. 그 조건은 반드시 12월 마지막날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은은한 멜로디에 맞춰 잠자리 날개 같은 긴 드레스를 입은 나와 월츠를 출 수 있는 멋진 남자 라야만 했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 곡은 안익태 선생의 작곡이 나올 때까지 우리 애국가에 붙여졌던 멜로디이기도 하다. 내가 이 곡을 사랑하게 된 동기는 평범하다. 친구들이랑 함께 본 ‘애수(본명: Waterloo Bridge)’라는 1차 대전 영화에서의 애틋한 장면.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로버트 테일러와 발레리나였던 연인 비비안 리가 나이트클럽에서 그 날의 마지막 곡인 올드 랭 사인에 맞추어 월츠를 추고 있다.

밤이 깊어지자 한 사람, 두 사람 오케스트라 인원들이 퇴장하고 촛불도 하나, 둘 꺼져가고 드디어 가느다란 멜로디 역시 모두 멈추었을 때 이 두 연인은 어둠의 적막 속에서 조용히 키스를 하고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였다. 올드 랭 사인은 본래 스코트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가 1799년에 쓴 구절인데 이를 그 나라 전통 민요가락에 삽입하여 주로 새해를 맞이하는 바로 그 순간 이 곡을 울림으로써 더 유명해진 유래를 갖고 있다.


며칠전 낡고 낡은 내 수첩 속에 깨알처럼 적어놓은 이 시인의 시를 우연히 발견했다. 오랜 우정을 잊어야 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올드 랭 사인의 의미는 간단히 ‘그리운 옛날’ 또는 ‘흘러간 세월’을 되새기며 우리의 우정을 늘 애틋하게 기억하자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Should auld acquaintance be forgot and never brought to mind?”
대학교 때는 이 시를 줄줄이 외며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던 생각이 감미로운데 얼마전 스코트랜드 한 대학의 교수진과 전교생이 41개의 언어로 동시에 올드 랭 사인 합창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얼마나 멋졌을까?

이제 2009년은 곧 그리운 옛날이 되겠지. 12월 31일밤 열두시 정각에는 흘러간 세월을 뒤돌아 보면서 많은 감사를 드리며 내년 12월까지는 로버트 테일러와는 거리가 먼 우리 남편과 꼭 월츠를 배워야겠다는 다짐의 축배를 들련다. 내 상상의 잠자리 날개옷을 이따금 걸쳐보며 이 아름다운 월츠 멜로디를 흥얼거리다 보면 어느새 내년의 올드 랭 사인 계절은 틀림없이 내 가슴속 깊숙이 들어와 앉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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