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진정한 민족 사랑

2009-12-28 (월)
크게 작게
서병선(뉴욕예술가곡연구회 회장/성악가)

지난 11월 18일 플러싱 등대교회에서 스티브 김 환영회가 열렸다. 뉴욕한인들의 감동적인 동포애가 큰 힘이 되어 최단기형을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된지 4년만에 뉴욕 땅을 밟은 것이다. 스티브 김 구명위원회 사무총장 직분을 맡았던 본인이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본다. 그는 독재 밑에서 억압받고 기아에서 허덕이는 북한주민의 참상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2002년 10월3일 UN본부 구내에서 권총 7발을 발사하고 북한의 실상이 담긴 전단을 뿌린 후 체포됐었다. 신문과 TV등 전세계 언론이 스티브 김 사건을 일제히 톱 뉴스로 보도했다. 독재자 김정일의 잔악성과 북한주민들의 참혹한 실상이 다시 한번 온 세상에 크게 알려졌던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지 한주후 뉴욕한인회관에서 기자회견이 있었다. 뉴욕타임스, NBC TV, 독일, 중국, 일본 등 전세계 언론이 모두 모였다. 50여명의 한인들도 참석했다. 참석한인들이 진지하게 의논한 끝에 스티브김 구명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우리자신이 할 수 있는 서명운동을 먼저 펼치기로 했다. 교회와 성당 각 슈퍼마켓으로 다니며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혈육인 북한동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스티브 김을 위해 쏟아지는 동포애는 지극히 감동적이었다. 가는 곳마다 서명행렬이 이어졌고 큰 충격과 함께 심적 물적 어려움을 겪게될 가족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성금도 계속 답지했다. 현지 미국인들도 서명에 대거 참여했고 성금에 동참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2003년 11월9일 등대교회에서 스티브 김 돕기 음악회를 열어 성전을 가득 메운 한인들이 모였고 6천달러의 성금이 모여 가족에게 전달했다. 꾸준히 노력하는 동안 서명인 수가 6,120명에 달했고 서명인 명부를 관선변호사인 John Curley변호사에게 전달했다. 몇 개월이 지나도록 Curley변호사가 한 일이라고는 거의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였다. 이 시기에 조석진 변호사가 무료 변호를 자진해 왔다. 선고재판날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뉴욕한인들의 정성이 담김 6.120 서명은 아직도 Curley변호사 사무실에서 잠자고 있었다.

“조석진 변호사님! 선고재판일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6.120의 서명이 아직도 판사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즉시 등기로 부쳐주세요” 드디어 마지막 선고공판이 500 Pearl St.연방법원에서 Robert Paterson 판사주재로 열렸다. 그는 명성 높은 주심판사였다. 40여명의 한인들이 참석했다. 곧이어 죄수복을 입은 스티브 김이 등장했다. 그의 진술이 암송된 영어로 15분동안 계속되고 끝으로 조석진 변호사의 장문 탄원서가 낭독되었다. 잠시후 10년과 25만달러의 벌금형에 내려질 수 있는 상황에서 27개월과 7,200달러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최소의 형량이 선고된 것이다. 우리 한인 참석자 모두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 있었다. 동포애의 승리였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