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예수 오심’의 진정한 의미

2009-12-2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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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형체를 빌어 이 땅에 오신 날이 바로 성탄절이다. 이 성탄절이 지금은 모든 세계의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축제가 되었다. 심지어 중국같은 공산주의 국가나 오랜 사회주의 국가로 지내오며 티벳 불교가 전체 국민의 90%정도를 차지하는 나라도 성탄절이 되면 온 도시가 이날을 축하하느라 요란스럽다. 성탄절 추리로 도심 곳곳이 장식되고 크리스마스 캐롤이 신명나게 울려 퍼지면서 사람들을 온통 들뜨게 만들고 젊은이들은 데이트하기에 여념이 없다.

성탄절이 주는 진정한 의미와 메시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날만 되면 온 지구촌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술에 취하고 떠들고 하면서 야단법석이다. 더군다나 기독교인이라면 조용히 그의 오심을 감격해 하며 인간을 위해 가장 낮고 겸손한 자세로 이 땅에 임한 그의 귀한 뜻을 되새기며 그의 가르침대로 인간답게 살다가 가는 길을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왜 구차한 모습으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태어났을까? 아마도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신은 인간이 되어 인간의 발을 몸소 씻어주는 모범을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겸손의 극치로 이 이상의 겸손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 인간들도 겸손을 본받으라고 크리스마스의 캐롤이 울려 퍼지는 것이리라.


지혜문학인 잠언서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는 ‘겸손’을 강조한다. 야훼께서는 교만한 자를 업신여기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였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였다. 성탄의 또 다른 의미는 섬김에 있을 것이다. 예수는 인간을 섬기기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났다. 너희들도 서로간에 섬기면서 살라는 것을 강조함이 아니었을까. 섬김은 자기희생을 의미한다. 초가 주위를 밝히려면 자신의 몸을 아무런 대가없이, 그리고 아낌없이 태워야 한다. 오늘 이 세상은 왜 이렇게 험악하게 되었을까? 섬김의 정신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정신이 사라진 것이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섬길 줄 알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을 배려할 때 이 세상은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챙기려고 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자리를 이용해서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한다. 이러한 세상은 살기가 점점 더 빡빡해질 것이다. 우리가 깨끗한 물을 마시자면 수원지를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자기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샘물을 사서 마시면 된다는 발상은 아주 짧은 생각이다. 지금 지구는 하나의 촌이 되고 말았다. 이웃집에 강도가 들어도 모르는 체 하는 동네는 내 집에 강도가 들었을 때도 나 몰라라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웃의 자녀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침묵하는 사회는 내 아이들이 당할 때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남이 잘하고 있는 가게 옆에 같은 종목의 가게를 차려 상대방 업소에 못할 일을 시킨다면 결국 자기에게도 언젠가는 그 불똥이 떨어진다.

남의 불행과 어려움이 나의 행복이고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서로간에 위하고 배려할 때 그 사회는 살만한 곳이 되고 가족이나 이웃간에 정이 메마른 사회는 어둡고 불행한 사회이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산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서로 손가락질 하며 비방하며 내가 잘났다고 소리를 높이고 고개를 쳐드는 것은 특히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취할 자세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너도 나도 마음놓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겸손과 섬김과 희생의 정신이 그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보다 못한 이웃이 있다면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는 생각으로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겸손함과 섬김의 정신으로 타인을 사랑하며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탄절이 지닌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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