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해도 가고 달도 가고

2009-12-2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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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규(훼이스 크리스챤대학교수)

이민자의 숱한 사연과 애환을 싣고 덜커덩거리며 달리는 7번 전철의 소음 속에 올해도 저물어 간다. 시간의 흐름이란 무섭다. 꼬챙이에 낀 곶감 배어먹듯 달력을 한 장씩 뜯으며 세월을 삼키다보니 이 지구가 태양을 한바퀴 도는 공전을 마무리하려는 시공의 좌표에 당도했음이다. 한 장 남은 비상금이 요긴하게 쓰인 경험들이 있다. 식탁에 오르는 국물에도 마지막 우러난 국이 진국이고 술맛도 뒤끝이 좋아야 제 맛이다. 달리기를 하다가도 마지막 결승라인이 보이는 지점에서 힘을 내어 용을 쓰게 된다. 전쟁에서도 최후 5분간이 승패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래서 사라들은 마지막 달에 일의 마무리를 위해 박차를 가하게 된다.

우리 한국에서도 음력을 세지만 대목에 일년 사업 일년 장사를 다 한다는 말을 한다. 이곳 미국도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할러데이 시즌에 1년 장사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금년치를 얼마나 이루었는지 손익계산서를 따져보면서 환희도 나오고 실망도 나올 것이다. 계산상 아직도 적자인 경우도 있겠고 흑자로 돌아선 이도 있겠지만 대부분 꿈의 정상을 바라보며 능선을 타고 오르고 있는 중일 것이다. 사실 정상에 올라서고 나면 더 나아갈 산등성이 없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고개를 넘고 골짜기를 헤치고 계곡을 건너고 절벽을 타는 거와 같은 산을 오르는 여러 힘든 과정이 있음으로서 정상을 향해 나가는 활력이 생기고 재미도 즐길 수 있는 게 아닐까. 아름다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과정이요 과거를 다스리는 것조차 현재를 겪어온 여러 가지 과정이다. 현재의 마음가짐만이 모든 역경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 있고 순탄한 환경 역시 오래 지속시켜 줄 수 있다고 본다.


어린 시절 섣달 그믐이 가까워 오면 음식솜씨가 좋은 친척 아주머니들이 와서 동지팥죽을 쑤던 기억이 난다. 우리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자기 나이대로 새알을 만들라는 말에 신이 나서 나이대로 새알을 만들어 죽이 부글부글 끓는 가마솥에 넣으며 즐거워했다. 죽이 다 끓고나면 어른들은 공지에 죽을 떠다가 액운이 못 들어오게 귀신을 쫓는다고 대문 밖에다 팥죽을 훽훽 뿌렸다. 그렇게 맛있게 새알도 건져먹고 팥죽도 먹는 사이 동지섣달은 저물어 갔다.
미국 이곳의 귀신 쫓는 풍습인 할로윈이 한해가 다 갈 무렵에 들어있는 게 우리 정서와 일치하여 흥미롭다. 마지막 달력 한 장이 하이얀 벽에 오롯이 붙어있고 그 아래 참눈으로 내려다보이는 마을 공원의 나무들도 며칠전 비바람에 얼룩덜룩한 단풍옷을 온전히 벗어버리고 서로들 어깨동무하며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모습 같다.

지난봄에는 파아란 잎사이로 꽃봉우리들을 흐드러지게 피게 하여 온 누리에 꽃향기를 풍겨주었고 여름에는 잎이 푸르게 우거져 시원한 녹음과 청량한 공기를 선사해주던 나무들이었다. 이젠 나무아래 깔려있는 무수한 낙엽송이들이 뿌리들을 다독거려 비바람도 막아주고 영양분도 만들어주며 겨우나기를 할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온갖 것 무성하게 뻗어가나 결국 모두 그 뿌리로 돌아가게 된다’고 설파했다. 무엇이든 생겨났으면 그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반복적 과정이 우주의 영원한 진리라는 것이다. 몸이 멀어지면 맘도 멀어진다고 그 동안 먹고 살아가느라고 격조했던 지기나 소원했던 친척들에게 크리스마스카드로 복을 기원하고 우리 인생의 뿌리가 되는 부모와 어른들에게 안부를 보내봐야 겠다.

끝은 시작을 배태하고 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암호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멀지않다고 어느 시인은 읊었던가. 이 해가 저물고 제야의 종소리가 아아라히 울려 퍼지면 여명의 햇살이 살포시 문안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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