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리의 영웅들

2009-12-2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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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가을은 농산물의 수확기이고, 12월 세모는 뛰어난 인물의 수확기이다. 요즈음의 미디어들은 각종 단체에 공헌한 유공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많은 분들이 제각기 다양한 능력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기관이나 단체들은 그런 일꾼들의 힘이 중심이 되어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CNN은 ‘영웅들’이란 제목으로 잘 보이지 않던 일꾼들을 소개하였다. 그들이 선발한 영웅들은 지략과 담력과 용맹의 뛰어남이 나타나는 사전적인 의미의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권력이나 권위, 재력이 있거나 지식이 남달리 높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영웅으로 불리는 이유는 계속적으로 하고 있는 일들이 사회의 그늘진 곳을 밝게 비추거나, 꺼져가는 생명들을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물이 귀한 지역에 물을 얻을 수 있게 하고, 다른 이는 불우한 어린이들을 모아 교육하고 있다. 혹은 장애인을 돕기도 하고, 소년 악대를 구성하여 행진하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상담원이 되기도 하고, 배고픈 사람에게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고, 간호 사업을 하면서 환자를 돕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무대 뒷면 후미진 곳에서 생명을 가꾸는 일들이고, 단시일에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묵묵히 오래 계속해야 성과가 보이는 일들이었다. 이런 영웅들을 선발한 기준이나 방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영웅 중의 한 분은 가까운 지역 거주민이어서 반가웠다. 그런데 며칠후 그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은 어떤 한 분을 입소문으로 알게 된 모 기자의 글을 읽었다. 인터뷰 기사를 쓰려고 몇 차례 연락하였지만, 그분이 끝까지 사양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영웅들이 여기 저기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영웅들이 바로 내 곁에 있다.


인간은 지혜롭다. 연대가 아득히 먼 곳에서 시작하여서 영원히 이어질 인간사를 알맞게 구분하여 정리하고 있다. 한 세기, 한 세대, 10년, 5년, 1년 한달, 하루로 구분하여 생활하면서 잡다한 지난 일들을 질서 정연하게 기록하고 있다. 연말에 어떤 기관이나 단체에서 유공자를 표창하거나, 사회의 영웅들을 선발하는 작업도 인간사를 정리 기록하는 방법이다. 기록이 없는 역사는 있고도 없는 허송 세월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일반인들은 역사와 무관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한 시대에 자리 잡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역사의 한 분자이다. 눈에 띄는 영웅이나 유공자로 선발되지 않았더라도 힘껏 살아온 생활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역사는 몇 사람의 사유물이 아닌 만인의 공유물이다. 다만 자기 자신의 평가를 중요시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받아 스포트 라잇을 받는 사람의 차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평가이다. 지난 일년 동안 건강하였나, 항상 즐겼나, 하고 싶은 일을 어느 정도 하였나, 다른 사람들을 자주 만났나, 하는 일에 새로움이 있었나, 새로운 친구가 생겼나, 일상 생활에 변화가 있었나, 일년 내내 노력한 것은 무엇이고 어느 정도 달성하였나...등을 한번쯤 꼼꼼히 생각해 보는 일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각자의 정리상자에 넣고 굳게 잠가버
리는 것이 좋다. 그래야 새해맞이 준비가 되지 않겠는가.

‘영웅’이란 선발된 특별한 사람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따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삶의 영웅들에게 둘러싸여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고 내 자신의 평가에 따라 바로 내가 영웅이 될 수도 있다. 그 영웅의 기준은, 오직 내 자신을 위한 일만 잘 하겠다는 편협한 마음의 높은 벽을 깨뜨리는 것이 첫 조건이다. 그리고 서로 돕고 사는 넓은 세상으로 시야를 넓히는 것이다. 거기에 분명히 일거리가 있다.이것저것 바쁜 것 같은 세모지만, 대인관계, 사물관계를 정리하는 즐거운 계절이다. 대나무가 줄기에 마디를 만들며 곧게 자라듯 사람도 묵은해를 정리하며 새해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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