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짜집기 가족들

2009-12-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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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연말 모임에 재혼한 부부가 새 둥지를 튼 집에서 모였다. 재혼한 부부들과 전 부인과 전 남편 자식들이 모두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있다. 지난 날들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낸 밝고 환한 표정들이다.그 어느 초겨울, 당시 50대 부부였던 그들이 나에게 찾아와 이혼선언을 했다. 그 선언은 무서운 폭발력으로 그의 가족을 산산조각으로 붕괴시켰다.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둘 사이에 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민 초기 이들 부부도 튼튼한 밧줄 같은 생존의 끈으로 묶여 있던 공동체였다. 그들은 지뢰밭 같은 삶의 최전선에서 하루에 12시간씩 함께 일했다. 지금 같이 끔찍한 고생을 견디고 나면 반드시 다가올 것 같은 찬란한 미래를 꿈꾸었던 부부들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잔인한 시간은 그들의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이들의 가슴을 할퀴며 흠집을 내었다. 그들이 함께 탄 배는 구멍이 뚫려 물이 스며들고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그들은 지난날의 얼룩을 모두 지워버리고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 새 둥지를 틀었다. 재혼한 부부들의 전 부인. 전 남편의 자식들이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나고 있다.이혼으로 갈갈이 찢어진 조각들을 짜깁기하여 다양한 색깔의 새로운 가족형태를 만들어냈다. 핏줄로 연결된 가족이 아닌 인위적인 관계로 엮어진 가족이다.이제 핏줄 가족은 별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곁에 앉아있던 친구는 한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도대체 무어야? 움직이지 않는 헌 가구처럼 늘 한구석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야” 이혼과 재혼이라는 과감한 도전으로 화려한 변신을 한 커플들의 맹렬한 기세에 눌려 주눅이 들리는 모양이다. 이 친구는 철없는 나이에 순수한 열정만으로 만난 남편과 숙명처럼 지금까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중문화의 미국 땅에서 살다 보면 이질적인 전통문화와 가끔 충돌한다. 클리닉 환자들 중에 이탈리아 계 혈족 (Intermarriage) 커플을 만났을 때 머리가 띵하도록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이들 부부는 이종 사촌간이다. 남편은 그녀의 이종 사촌 오빠이고 아내는 그의 이종 사촌 누이동생이다. 아내의 시어머니는 그녀의 이모이고 남편의 장모는 그이 이모이기도 하다. 그들은 혈
연의 고리와 부부관계가 실타래처럼 뒤엉킨 관계로 너무나 혼란스럽다.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펼쳐지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대농장주의 장녀 스칼렛 오하라가 사촌인 애슐리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혈족간의 영화 속의 사랑이 현실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국 문화권에서 근친상간으로 금지된 혈족결혼은 유전성 질환을 일으키는 우생학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거창한 우주법칙의 섭리를 들추지 않더라도 동성애자들의 애정행각도 습지에서 피어나는 독버섯처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개방된 성문화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미국에 동화되어가는 한인들의 가족문화를 다시 재정립해야 한다 전통가족 가치관을 지키는 커플은 낡은 시대의 아날로그 커플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 가족윤리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 하나 둘 나이테의 무늬를 그려가는 고목나무처럼 연륜의 깊은
주름살이 잡혀가면서 함께 늙어가는 부부들이 줄어들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초고속도로 질주하는 디지털 시대를 역류할 수 있을까?

이제 연말 가족 모임에는 핏줄로 이어진 전통적인 가족 형태는 사라져가고 있다 .핏줄이 아닌 인위적으로 연결된 짜깁기 가족들이라고 하는 새로운 신조어 가 탄생하고 있다. 가정이 해체되면서 찢어진 상처에서 돋아나는 새살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가족형태다. 실패한 결혼을 성공으로 역전시키려는 역동적인 삶은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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